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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2회 ① 검사와 원장

등록 2014-09-12 22:56수정 2014-12-03 11:15

영원히 단죄할 수 없는가

감히 건드렸지만 무너지지 않은 성주
원장 박인근의 거꾸로 선 기억 속으로
등장인물

1984년 5월11일, 박인근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고 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1984년 5월11일, 박인근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고 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1984년 5월11일, 박인근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고 있다. 박인근이 2010년 발간한 회고록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에 수록된 사진이다. “신앙 양심을 앞세워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로 형제원 운영 실정을 기록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지인 부탁을 받고 사건을 해명하기로 했다.” 그가 1987년 원생들을 감금하고 정부 지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지 23년 만에 회고록을 낸 이유다. 박인근이 말하는 진실은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은, 자신만의 입장이자 조작된 기억이었다. 1987년 대한민국의 민낯은 박인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도시 정화를 위해 부랑인 감금을 합법화했으며, 박인근이 구속되자 정부, 사법권력, 정치인들은 사건을 덮고 진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전국 36곳의 부랑인 수용 시설에서 제2의 박인근들이 벌이는 원생에 대한 인간 모독은 제도로써 보호됐다. 복지원 사건을 무마하려 한 권력들은 1990~2010년대 법무부 장관, 국회의장 등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 1987년, 국가는 없었다. 박인근은 지금도 단죄받지 않고 있다.

▶ 형제복지원 2부는 박인근 회고록, 800여쪽의 검찰 기록, 야당 진상 보고서, 1987년 언론 보도, 판결문 등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정부는 전국 36곳의 수용시설에서 박인근 원장과 제2의 박인근들을 양산했습니다. 박인근은 지금껏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에 동조할 수 없지만, 유일한 가해자로 자신이 인식된 측면은 억울할 것입니다. 형제복지원은 인간에 대한 국가 폭력이자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자들을 배제했던 1987년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대한민국 거지를 소탕한 나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 박인근이 출소할 때에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완전히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우리 집 사람 임 권사가 놀라서 영적인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고 형제원 사건을 이야기하면 무감각하며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32일부터 이러한 증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분은 하나님께 그 일을 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라 하면서 기도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 아내와 자녀들을 호주 학교에 보내고 호주 시드니에서 휴양하며, 교회에 나가면서 과거를 회복시켜 달라며 기도하였습니다. (…) 호주에 있을 때 형제원 사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마음 편안하게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박인근 회고록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 310쪽)

2010년 여든한살의 노인이 회고록을 펴냈다. 대통령과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두번이나 상을 받고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가 됐던 그는 1980년대 대한민국 복지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성공 가도를 달렸던 이 노인의 인생은 1987년 1월16일 첫 실패를 경험한다. 갈 곳 없는 부랑인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것으로 알려졌던 노인은 쉰여덟살의 나이에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며 구속됐다. 세상은 그때부터 자신이 일군 부산 형제복지원을, 12년간 원생 513명이 숨진 지옥으로 기억했다.

인간은 타인에게 던져준 깊은 고통보다 자기 몸에 난 작은 생채기가 가장 쓰라리다. 노인은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진실은 사실에서 비롯되지만, 때로 신념에서 잉태된다. 노인은 자신의 신념에서 발견한 진실을 믿었다. 신념 안에 자리잡은 형제복지원과 그곳에 수용된 부랑자들은 타인들의 기억과 달랐다. 그에게 형제복지원은 1970~80년대 정부 시책에 맞추어 능력 없고 쓸데없는 부랑인들을 격리하고 적극 계도한 대한민국 최고의 복지시설이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자들이 사라졌다며 한때는 국가가 훈장을 주더니 나중에는 그들을 감금했다며 세상이 손가락질을 한다. 자신이 왜 구속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23년 만에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을 알리고 과거 사건을 해명하기로 작심했다. 노인이 직접 쓴 것인지, 작가가 대신 집필한 것인지 모를 회고록에 담긴 내용은 기록자의 시점과 시간 순서가 오락가락했다. 노인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 성공과 추락, 사진과 각종 자료들을 모은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은 1885쪽에 달했다. 노인, 박인근은 회고록을 준비하며 기억하고 싶지 않던 1987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형제복지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형제복지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박인근 원장을 구속하면 안 됩니다. 빨리 석방해야 합니다.”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젊은 검사 김용원은 1987년 1월18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김주호 부산시장이다. 농수산부 출신으로 경남지사에 발탁됐다가 부산시장 자리로 옮긴 김주호 시장은 당시 잘나가는 관료였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전인 1987년, 지역단체장들은 선출직이 아닌 제5공화국에서 임명된 공무원이었다.

김용원은 김주호 시장의 제안을 거절한 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첫 발령지인 서울중앙지검에서 2년6개월을 보낸 서른두살의 김용원은 울산지청으로 내려와 일생일대의 거대한 수사를 벌였다. 성공한 사회복지 사업가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는 일이다. 박인근은 만만찮은 상대였다. 과거 형제복지원에서 감금당했다고 고소한 자가 도리어 무고죄로 구속된 전력이 있을 만큼 거물이었다. 1월17일 박인근을 구속한 다음날부터 그를 비호하는 세력은 빠르게 움직였다. 진실을 막으려는 권력들과 검사 한 명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 살인 사건이 터졌다.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이 악화됐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중들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 살인 사건을 무마하면서, 동시에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이 연일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정권으로서는 없던 일로 덮을 수만은 없었다. 울산지청은 검찰 수뇌부에 박종철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이 서로 관련이 없음을 해명해야 했다.

2월4일 울산지청 정보보고

○검찰에서 수사 착수 당시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 치사 사건을 염두에 두었는가.

-당 지청에서 먼저 복지원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으므로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 치사 사건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 지청에서 내사 착수한 것이 1986년 12월 초이고 일단의 자료를 수집 완료한 것이 1987년 1월12일이며 직접 피의자 임의 동행을 염두에 둔 것은 1월13일인바 이에 반하여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87년 1월14일이고 고문 치사의 혐의가 있다고 발표된 일자도 1987년 1월18일이며 고문치사가 명백하다고 발표된 것은 1987년 1월19일임.

울산지청의 해명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숨지기 약 한달 전인 1986년 12월21일 일요일, 우연한 기회로 포착됐다. 이날 사냥꾼의 차를 타고 꿩을 잡으러 울주군의 산속을 헤맨 김용원은 저녁까지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숲 속을 다니던 사냥꾼은 김용원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졌다.

“멀지 않은 곳에 이상한 작업장이 하나 있는데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인부들을 지키고 있어요. 경비원들이 개 패듯이 인부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지요.”

“거기가 어디요? 한번 가봅시다.”

김용원은 사냥꾼과 함께 알 수 없는 숲 속 길을 따라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자동차 교습소 건설 현장이었다. 사냥꾼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용원이 차에서 내려 작업장 안으려 들어가려 하자 몽둥이를 든 청년들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다. 사나운 개들이 컹컹 짖었다. 청년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김용원을 주시했다. 김용원은 작업장을 얼른 빠져나갔다.

김용원은 다음날인 22일부터 내사에 착수했다. 운전 교습소 건설이 한창인 경남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 산97 지번은 아직 정식으로 초지 훼손 허가가 난 곳이 아니었다. 김 검사는 경찰관들에게 쇠창살로 가로막힌 인부들의 숙소와 몽둥이를 든 경비원들을 사진기로 촬영하도록 했다. 인부들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원생으로 이곳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

김용원은 차를 타고 형제복지원을 찾아가 주위를 빙빙 돌았다. 단단한 철문, 성곽 같은 담장이 에워싼 건물은 교도소를 연상시켰다. 단 한번에 치밀하게 덮치지 않으면 손안에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김용원은 1월13일 오후, 조사 결과를 요약한 보고서를 들고 부산지검 박희태(2010~2012년 18대 국회의장, 1993년 42대 법무장관 등을 지냈다) 검사장실을 찾아갔다. 영장을 발부받아 원장을 조사하고 압수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마침 송종의 차장검사는 자리에 없었다. 김용원은 검사장의 허락을 받은 뒤 다시 형제복지원 외곽을 둘러보며 출입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문으로 쳐들어갔을 때 원장이 후문으로 빠져나갈지도 몰랐다. 다행히 정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1987년 1월16일 금요일, 대어를 낚을 날이 다가왔다. 김용원 검사는 경찰 100여명을 동원해 정문을 뚫고 복지원 안으로 들어섰다. 출입문은 이중 장금이 돼 있는 완벽한 감금시설이었다. 원장은 마침 복지원에 없었다. 김 검사는 복지원 간부들을 붙잡아 차에 태우고 나무 몽둥이 13개, 1985년 경리 장부 17권, 86년 경리 장부 14권, 지출 증빙 자료, 도망자 명단, 사망 관계 서류, 퇴원자 명부, 각종 차용증서, 원생들의 1일 작업 현황, 수익 사업 대장 17권, 원생들의 임금을 강제 저축시킨 적금 관계 노트 5권 등을 압수해 차에 실었다.

박인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용원이 원장실에 들어가 대형금고를 산소 용접기로 열자 대충 계산해도 20억원이 넘는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가 쏟아졌다. 복지원 직원으로부터 검사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박인근은 금고가 털리자 그제야 복지원에 나타났다. 그는 김용원 검사 앞에서 적개심을 드러냈다. “왜 남의 금고를 부수는 거요?”

김용원은 박인근을 호송 차량에 실었다. “이 복지원에 사고 나면 당신 책임질 거야?” 박인근은 거만한 자세로 김 검사에게 소리를 쳤다.

복지원 간부, 원생들까지 100명이 넘는 인원을 불러들인 울산지청은 그날 발 디딜 틈 없이 미어터졌다. 박인근은 “검사장을 불러오라”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법원은 다음날인 17일 박인근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박인근은 복지원 수용자들을 동원하여 산속 초지를 훼손하고 동물 축사를 수용자 숙소로 불법 용도 변경했으며 당시 법률상 정부 허락 없이 외화를 소지한 혐의 등을 받았다. 김 검사는 부산지검, 대검찰청, 법무부에도 사건 내용을 보고했다.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끊임없이 드러났다. 김용원은 박인근이 구속되기 약 5개월 전 울주 작업장에서 마흔살 원생 김계원이 소대장 김충식(가명)에게 두드려 맞아 숨진 뒤 암매장된 사실을 추가 확인했다. 1986년 8월1일 오전 10시, 김충식은 도망치려다 붙들린 김계원을 꿇어앉힌 채 작업장에서 일하던 원생 180여명을 집합시켰다. 김충식은 180여명이 보는 앞에서 김계원을 발과 주먹으로 후려치고 짓밟았다. 김계원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어갔다. 폭력에 익숙한 원생들도 주검이나 다름없는 처참한 김계원의 몸을 보지 못해 눈을 돌려야 했다.

박인근에게 형제복지원은
정부시책 맞춰 부랑인 격리한
대한민국 최고 복지시설이었다
국가에 훈장까지 받지 않았는가
그는 억울해서 회고록을 썼다

1987년 1월16일 금요일
김용원 검사는 경찰 100여명과
복지원 정문을 뚫고 들어갔다
“사고 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박인근이 거만하게 소리질렀다.

김계원은 두드려맞아 숨진 뒤
암매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1975~1986년 숨진 것으로 된
원생 513명도 미스터리였다
사망 서류는 의혹투성이였다

다음날인 2일 김충식은 정신을 잃은 김계원을 목욕탕에 끌고 가 찬물을 끼얹으며 물을 길으라고 작업을 지시했다. 김계원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울주 작업장의 동료 원생 윤우택은 생명을 잃어가는 김계원의 가슴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 그날 밤 김계원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차마 감지 못한 두 눈은 허공을 향했다. 원생 이용완은 자신의 손으로 김계원의 눈을 감겨 주었다. 3일 밤 11시, 형제복지원 사무장 주영은이 김계원의 주검을 차에 싣고 갔다.

그의 죽음은 심부전증으로 조작되었다. 형제복지원 촉탁의사인 정명국은 4일 부산시 동래구 연산동 부산의료원 영안실에서 김계원의 주검을 형식적으로 검안했다. 다음날인 5일 오전 11시, 의사 정명국은 직접 사인은 심부전증, 선행 사인은 전신 쇠약이라고 진단서를 작성했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정명국은 부산 북구 의사협회장이었고 영세민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한다는 이유로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과 대통령 국민 포장을 수상한 인물이었다. 부산지방검찰청선도위원, 부산시청 위민실 위민위원으로도 활동한 의사 정명국은 1983년 1월부터 형제복지원 촉탁의로 활동해왔다.

관련자들은 검찰 조사에서 김계원의 죽음을 이렇게 진술했다. 그들의 진술은 일정 부분 일치했고, 어느 지점에서는 달랐다.

형제복지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형제복지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김충식: “8월3일, 부산에 가서 구타 사실을 보고했고 다음날 원장으로부터 김계원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준은: “김계원이 죽어서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주영은이 김계원은 폐결핵 3기인데 그 때문에 죽었다고 소대원에게 이야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인을 바꾼 의사 정명국은 구속되지 않았다. 검찰 상부는 김용원에게 의사 정명국에 대한 불구속 지시를 내렸다. 정명국의 형이라는 자가 당시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로비를 벌였다고 했다. 매번 상부의 지시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형제복지원에 대한 수사 자체를 덮어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김 검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조사실에 앉아 있던 의사 정명국을 발로 걷어찼다.

“불구속 수사하라네. 그렇게 할 테니까 한 대 맞자.”

의사 정명국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계원의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1975~1986년 숨진 것으로 처리된 원생 513명의 죽음도 미스터리였다. 형제복지원은 1986년 사망한 96명 가운데 56명을 연고자에게 인계했다고 밝혔으나 이 가운데 일부는 사망 서류에 적힌 것과 달리 연고가 없거나 주소가 맞지 않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986년 사망자 96명 가운데 김천박(남·22살), 전남일(남·15살) 구일동(남·6살) 구포남(남·20살) 구일순(여·30살) 6명이 연고자에게 사체가 인계됐다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적, 주소가 또한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상택(38살) 김영슬(53살) 이방구(65살) 김덕순(38살) 등 11명은 사체 처리가 불분명하고, 연고자에게 사체 처리를 인계했다는 이천용(48살 86년 3월3일 입소, 86년 9월19일 사망)의 경우 주소지를 확인한 결과 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사체가 병원에 실험용으로 팔려간다는 면담자(원생)들의 주장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적어도 (사망자 현황 등을 기록한) 새마음지에 기재된 사인과 사체 인계 등의 기록은 많은 경우 허위 기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신민당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단. 1987년 1월29일~2월1일 조사 결과 1차 보고서)

김 검사는 울주 작업장 관련 수사를 마친 뒤 부산의 형제복지원에 대한 수사를 착수하려고 했다. 경찰관 30명에게 수사 사항을 알려주고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이를 보고받은 부산지검 송종의 차장검사는 김 검사에게 노발대발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수사를 해?” 부산 형제복지원의 인권 실태는 물론이고 12년간 사망한 513명에 대한 수사는 진척될 수 없었다.

지난 10월22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지난 10월22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검찰 상부는 김 검사에게 박인근의 외환관리법 위반 등 이미 언론에 드러난 범죄만 수사하고 더 이상 파헤치지 말 것을 강요했다. 김용원은 1월21일 법무부에 정보보고를 했다. “명에 의하여 업무상 횡령의 점, 수사를 중단하였음.”

그러나 물밑으로 수사가 지속됐다. 김용원은 수사를 시작한 지 3개월 뒤에 박인근의 국고지원금 횡령 액수가 11억4254만원임을 파악했다. 횡령 추정액은 1985~1986년 정부와 부산시 보조금 39억원 가운데 삼분의 일에 가까운 돈이었다. 1987년 서울 강남 압구정동 50평형 현대아파트 1채가 1억5000만원~1억6000만원에 거래되었으므로 박인근의 횡령 추정액은 강남의 50평형 아파트 7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박인근은 고급 아파트, 골프 회원권, 콘도 미니엄을 소유하고 있었다. 횡령 방법은 치밀하고 꼼꼼했다. 주로 백지 영수증을 받아 허위로 기록했다. 영수증에 기록된 피복 상점이나 식료품 상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형제복지원의 증빙 영수증에 적힌 가게 주인들은 거래 사실이 없거나 과장됐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김용원은 애초 횡령액을 3억6893만6460원으로 공소장에 기록했다가 뒤늦게 추가 횡령 사실을 밝혀내 공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소장 변경을 부산지검에 신청했다. 법률상 횡령 액수가 1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다. 부산지검은 공소장 변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김 검사는 5월15일 오전 6시30분께 호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박희태 부산지검장 관사에 찾아갔다. 지검장은 김 검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5월20일 소년체전 참가차 부산에 오니 그 이후에 공소장 변경을 검토하세.”

“검사장님, 그럼 제가 사직하겠습니다.”

“사건 하나 해가지고 영웅이 되려고 하지는 마.”

박희태 검사장과 김 검사는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수사를 막으려는 권력과 사건을 놓지 않으려는 김 검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박희태 검사장은 송종의 차장검사에게 전화를 건 뒤 김 검사에게 바꿔주었다. 차장검사가 김용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꼭두새벽에 검사장 관사에 왜 갔어?”

“그만하십시오. 이제 그런 말 듣는데 신물 났습니다.”

검찰 상부의 수사 방해는 매번 집요하고 끈질겼다. 부산지검은 이후 공소장 변경에 결국 동의해주었는데 횡령 액수를 7억원 이하로 맞추라는 조건을 달았다. 김 검사는 공소장 목록 가운데 일부를 가위로 잘랐다. 공소장의 횡령 액수는 11억4254만원에서 6억8178만원으로 바뀌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5월20일 전국 소년체전을 참관하러 부산을 방문했다. 김주호 부산시장은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김주호 시장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1993년 나온 김용원 검사의 <브레이크 없는 벤츠>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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