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법관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나?
“여성과 소수자를 위해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싶다.”
-법관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뭐라고 생각하나?
“균형 감각이다.”
2011년 11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과 박보영(53·사법연수원 16기) 대법관 후보자 사이에 오간 일문일답이다. 대법관들 다수와 달리 여성·비서울대(한양대)·변호사(판사 퇴직 뒤 8년)라는 ‘스펙’을 가지고 있던 세번째 여성 대법관의 출현이어서 법조계 안팎의 시선이 모였다.
취임 3년을 앞둔 현재 그는 ‘여성과 소수자 권리’와 ‘균형 감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을까? 안타깝지만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신장과 관련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다양성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청문회 때 발언에서 이런 결과는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3년 가까이 참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박 대법관은 말수가 적었다. 총 56차례 참여해 반대·보충·별개의견을 낸 비율이 17.8%뿐이다. 통상 다수의견을 따르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5차례만 전원합의체 판결에 참여한 조희대 대법관을 제외한 대법관들 가운데 고영한 대법관(13.2%)에 이어 두번째로 낮은 수치다. 반대의견을 내거나, 다수의견과 결론은 같지만 다른 법논리를 제시(별개의견)하거나, 다수 또는 반대의견을 보완(보충의견)하는 의견들은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치열한 논쟁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박 대법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는 얘기다.
김소영(49·19기) 대법관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성인 박보영·김소영 대법관의 반대의견 개진 비율은 각각 8.9%, 9.7%로, 전체 대법관 평균(12.4%)에도 미치지 못했다. 별개·보충의견까지 더한 비율도 각각 17.9%, 19.4%로 대법관 평균(22.3%·양 대법원장 제외)을 밑돌았다.
박보영 대법관은 취임 석달 만인 2012년 4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유죄 판결(주심 김용덕 대법관)에 반대의견을 냈다. 박일환·전수안·이인복·이상훈 대법관과 함께 “국가공무원법이 금지한 ‘공무 외의 집단행위’는 ‘공익에 반하는 목적을 위한 행위’에 한정해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국가질서 유지보다 우선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소수자 권리나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앞세운 의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1월 ‘세입자의 임대차보증금에 대한 가압류 효력이 새로운 집주인까지 미친다’고 한 판결에서 신영철·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과 함께 ‘가압류 효력은 승계되지 않는 게 본래 취지에 맞다’는 반대의견을 내는 등 개인·법인간 분쟁 등에서만 4건의 반대의견을 더 낸 게 전부다.
김소영 대법관은 취임 반년 만인 지난해 5월 박아무개(73)씨 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 판결에서 반대의견을 냈다. 이 판결에서 김 대법관은 이인복·이상훈·김용덕 대법관과 함께 “진실규명결정은 신빙성이 매우 높은 유력한 증거로 보아야 하고, 명확한 반증이 없는 한 그 신빙성을 쉽게 부정하면 안 된다”며 다수의견에 반대했다. 김 대법관은 ‘이혼시 재산보다 부채가 많아도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한 판결(주심 박병대 대법관)에선 “이혼 후 생활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이혼을 주저하는 부부 일방, 특히 여성에게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재산분할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이상훈 대법관과 함께 반대의견을 냈다. 그밖에 국유재산 무단점유자에게 국가가 변상금 징수권 행사와 더불어 부당이득반환 청구를 연달아 할 수 있다는 판결에서 반대의견을 냈다.
박보영·김소영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전원합의체 사건들을 보면 ‘성적’은 더욱 초라하다. 어떤 사안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되고 논의되는 데에는 주심 재판관의 역할이 절대적인데, 두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 사건 가운데 국민 기본권이나 소수자 권리, 또는 실생활에 밀접한 사안을 다룬 것은 1~2개뿐이다.
박 대법관은 지난해 6월 한국인 남편과 다툰 뒤 13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간 베트남 여성의 유무죄를 가리는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주심을 맡아 미성년자 약취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는 데 역할을 했다. 이 사건에서는 여성이 폭행이나 협박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 아들을 외국으로 데려간 행위도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었다. 김 대법관은 지난해 4월 ‘부가가치세가 잘못 산정된 경우 납세자는 부가가치세 취소 소송을 내면서 동시에 감액경정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재판에서도 주심을 맡았다. 부가가치세 취소 소송과 감액경정 소송을 이중으로 진행해야 하는 납세자들의 불편을 덜어준 판결이다.
두 여성 대법관의 ‘부진’은 대법원 구성에서 실질적 다양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한 현직 대법관은 “여성이나 비서울대 출신이라고 진보·개혁적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다. 전원합의체에서 소수의견을 내려면, 누가 보더라도 그런(소수자를 위한) 투철한 삶을 살았거나 이론적인 깊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출신 직역·지역·성별·학교를 기준으로 다양성을 평가하는 풍토를 재고해봐야 할 때란 얘기다.
김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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