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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소통하는 법원’ 내세웠지만…국민 신뢰 얻지 못해

등록 2014-09-23 21:57수정 2014-09-24 08:21

[심층 리포트] 양승태 3년, 대법원 집중점검
③ 양승태 사법부의 미래는

장애인·외국인 등에 문턱 낮췄지만
세월호·원세훈 관련 조처 등
법원 내부서도 떨떠름

상고법원으로 ‘정책법원’ 추진 긍정적
“서울법대·50대·남성 법관
구성틀 개선해야 실효 있어”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은 사실상 이용훈 체제 2기다. 공판중심주의와 국민참여재판 확대, 법조일원화와 평생법관제, 상고법원 문제 등 현재 추진중인 정책 가운데 전임 대법원장 체제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

법원행정처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추진되고 있는 사법행정의 큰 틀은 전임자 시절에 짜인 것들이다. 전임자 시절의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양 대법원장이 유독 강조하는 가치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2011년 취임 뒤 ‘국민과 소통하는 열린 법원’을 기치로 내걸고, 장애인 사법 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다. 외국인·이주민을 위한 사법정보 누리집도 냈다. 대법원 법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전원합의체 공개변론 과정을 생중계하는 실험도 시도됐다. ‘국민과의 소통이 법원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는 게 양 대법원장의 지론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높아졌는지는 미지수다. 실제 사법부는 지난 7월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10점 만점에 3.69점을 기록해 국회(2.85점)에 이어 11개 기관 가운데 10위에 그쳤다. 특히 세월호 사건 처리와 관련해 ‘청와대 코드 맞추기’로 해석될 법한 행보를 보이면서, ‘사법행정의 소통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 법원 안에서 나오기도 했다.

6월9일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전효숙)는 “대형참사 사건의 재발 방지와 안전사회를 위한 국민적 염원이 양형에 중요하게 참작돼야 한다”며 “양형기준은 피해 규모가 크지 않은 전형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 권고적 효력만 가지므로, 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하는 안전사고의 경우에는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공표했다. 재판이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조처여서 뒷말을 낳았다.

앞서 5월20일에는 법원행정처가 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하는 대형참사 사건과 관련해 “책임에 걸맞은 엄중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 적절한 양형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까지 보이며 책임자 처벌을 다짐한 ‘세월호 대국민 담화’ 직후였다. 대통령의 언급을 기다렸다는 듯 사법부가 기민하게 대응책을 내놓자 상당수 법관들도 “타이밍이 좀…”이라며 당혹해했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대법원의 이런 처신은 행정처 내부에서도 논란이 됐다. 한 현직 대법관은 이 두 사안에 대해 사석에서 “솔직히 낯뜨거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9월11일 원세훈(63)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 판결한 1심 재판부를 비판한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의 내부통신망 글을 법원행정처가 3시간여 만에 삭제한 것도 뒷말을 낳았다. 자유로운 의견 개진에 인색한 양 대법원장의 성향이 반영된 조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한 중견 법관은 “(동료 판사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그런 식의 문제제기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대법원이 글을 바로 지워버린 행태도 문제라는 게 판사들의 일반적인 분위기 같다”고 말했다.

현재 대법원의 최우선 순위 사법행정 과제는 상고법원 설치다. 1년에 4만건 가까운 사건들이 밀려들고 있는 대법원에서 ‘권리구제형’ 일반 사건들은 상고법원으로 넘기고, 대법원은 사회에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한 법령해석의 통일 등에 주력하는 정책법원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임기 안에 상고법원 설치 하나만은 해결하고 가겠다는 게 대법원장 의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체 사건의 60% 정도를 심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기각하는 이른바 ‘심리불속행’으로 걸러내고 있는 대법원의 현실을 고려하면, 상고법원 도입 논의의 필요성은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추진 방식을 두고서는 앞뒤가 바뀌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고법원 설치는 대법원의 부담을 덜어 소수 핵심적 사건에 대한 정책적 판단을 강화하겠다는 뜻인데, ‘서울법대 출신 50대 남성 법관’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대법관 구성을 보면 대법원은 전혀 정책법원으로 나아갈 뜻이 없어 보인다. 단순히 사건 많은 게 부담이라면 대법관 수를 늘리면 그만”이라고 했다. 지금과 같은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그대로 둔 채 정책법원화하겠다는 것은 자칫 더욱 견고한 보수주의자들의 아성을 만들어주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고위 법관들을 위한 ‘자리 늘리기가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관의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상고법원 설치는 고위 법관들을 위한 자리만 늘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며 “지역법관제를 폐지한 데 이어 상고법원까지 만들게 되면 대법원장이 휘두를 수 있는 인사판만 커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양 대법원장은 평소 존경하는 법률가로 제10대 미국 연방대법원장 윌리엄 태프트를 꼽는다고 한다. 대통령을 한 뒤 대법원장에 취임한 윌리엄 태프트는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는 등 1920년대 연방대법원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당시 미 연방대법원은 사건 수의 부담에서 벗어나 정책법원으로 자리잡으면서 ‘1인1표제 허용’, ‘흑백 차별 금지’ 등 세상을 바꾸는 판결들을 내놨다. 양 대법원장이 한국의 윌리엄 태프트가 돼 그런 방향으로 대법원을 이끌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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