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불법으로 규정됐던 것도 시대가 바뀌면 용인되는 경우가 있다. 대법원은 시대 변화를 반영해 과거 판례를 바꾸기도 하는 데 이때는 반드시 전원합의체를 거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 95건 가운데 판례변경은 44건(46.3%)이었고, 양승태 현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59건 가운데 25건(42.4%)이었다. 판례변경 비율이 약간 줄었는데, ‘시민적 권리의 신장’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하락세’는 더욱 가파르다.
이 전 대법원장 시절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사건에서 시민의 권리를 확대하거나, 임차인·중소기업 등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취지의 판례변경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한국토지공사가 임대아파트를 분양아파트로 전환할 때 법정 기준 이상의 분양전환 가격 책정은 무효라는 판결이 대표적이다. 무주택자에게 합리적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하자는 임대주택법의 취지를 살리는 의미가 컸다. 미등기주택 임차인도 경매 때 우선변제권을 인정해 경매절차 편의보다 임차인 보호에 더 큰 가치를 뒀고, 한도를 초과한 부동산 중개료는 무효라고 판결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했다.
재소자가 상소이유서를 기한 내에 교도소장에게 냈다면 제출 기간이 지나 법원에 접수됐더라도 효력을 인정해주고, 다른 구제 수단이 있어도 행정처분 무효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해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도 확대했다. 당시 판결문과 언론 기사를 종합해 보면, 시민 또는 약자의 권리 보호로 평가될 수 있는 사건은 16건(36.3%)이었다.
양 대법원장 시절 판례변경 가운데 일반인의 권리 보호·확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은 △자살한 군인 국가유공자 인정한 판결 △국선변호인이 항소이유서를 안 냈으면 변호인을 바꿔 다시 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한 판결 △부가세 소송에서도 감액 청구를 할 수 있게 한 판결 △부부 사이 강간죄 성립 판결 △이혼 시 퇴직금도 재산분할 대상 포함 등 5건(20%) 정도다. 여기에 긍정·부정적 반응이 혼재돼 논란이 컸던 통상임금 판결을 더해도 24% 수준이다. 나머지는 법률적 쟁점을 정리하거나 개인간 민사분쟁 사건들인데, 이마저도 상표·특허 관련 사건 등 시민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사안들이 많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