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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법, 개인 권익 수호보다 국가·기득권층 이익 앞세워

등록 2014-09-22 20:47수정 2014-09-23 08:21

[심층 리포트] 양승태 3년, 대법원 집중점검
② 제 구실 못하는 대법관들

‘국가폭력 피해’ 소송선 국가에 관대
‘통상임금’ 소송선 노동자 권리 제약
‘제주 강정마을’ ‘키코’ 사건 등
약자에 불리한 판결 다수

부부사이 강간죄 성립 인정
33년만에 판례 변경은 의미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민법(제2조 1항)에 규정된 이른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성의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인 신의칙은 민법의 대원칙이다. 그런데 대법원 다수파는 신의칙을 국가에는 관대하게, 국민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6월 대법원 1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1950년대 군대에서 미화작업을 하다 야산 흙더미에 깔려 숨진 원아무개(당시 23살)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권리 행사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할지 3년까지 인정할지에 대해 유족의 사정 등을 심리하지 않은 채 당연히 3년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한 원심의 심리가 미진하다”고 지적했다. 원씨 유족은 국방부 진상조사 결과를 통보받고 1년4개월 뒤 소송을 냈는데, 대법원은 매우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6개월 안에 소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민법에서는 권리 행사를 막는 사실상의 장애가 사라진 때부터 통상 6개월 안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런 민법상 시효정지 기간에 준해 6개월의 기간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한달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뒤 사망한 ‘진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의 박아무개·곽아무개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낸 판결을 따른 결과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의 시효는 원칙적으로 손해 발생일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이다. 법원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과거사위원회 등의 진상규명 결정을 받고 3년 안에 소송을 내면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식으로 과거사 문제를 다뤄왔다. 그런데 대법원은 그 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을 때만 3년으로 한다고 판결했다. 참여정부 때 법원 판결은 국가가 어두운 과거사를 반성하고 금전으로나마 책임지는 수단이었는데, 보수 언론 등이 ‘왜 수십년 전 국가의 잘못을 세금으로 해결하냐’며 반발한 뒤 이런 판례가 나온 것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사법부가 국가에 요구해오던 신의칙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셈이다. 하지만 이에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은 아무도 없었다.

7개월 뒤 대법원은 ‘통상임금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지난해 12월 자동차부품업체 갑을오토텍의 퇴직자인 김아무개(49)씨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산정한 퇴직금과 연차수당을 추가 청구한 사건에서 “그동안의 노사합의 관행에 어긋나 신의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원고 승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반영하지 않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노사합의도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신의칙상 허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특별한 사정이란 기업 재정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거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노사합의 관행이 있다는 등 가정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들이다. 김씨는 단체협약 체결에 관여하지 않은 비조합원으로 관리직 사원이었는데도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노사합의를 마냥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가폭력 피해자 소송에서는 국가에 신의칙을 느슨하게 적용해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주고, 노동자들을 상대로는 신의칙을 과도하게 적용해 권리행사를 가로막은 셈이다. 다수파 대법관들의 이런 국가·기득권층 중심적 태도는 “강행 규정인 근로기준법에 반한 무효행위를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법관이 신의칙을 동원하여 마음대로 박탈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소수파(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의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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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국민 기본권을 둘러싼 논쟁적 사건들을 전원합의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지난 3월 최연봉(59)씨 등 전 동일방직 노조원 2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받은 원고들은 재판상 화해 성격인 보상을 받았으므로 다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민주화운동보상법은 일실수입(불법행위 피해로 잃은 수입)과 치료비에 대한 보상만을 다룰 뿐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와는 별개”라는 등의 이유로 보상과 별도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들이 있었기에 전원합의체에 올려볼 만했지만 대법원은 소극적이었다.

결국 하급심 법원이 나서야 했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지난 6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김아무개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생활지원금 수령을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규정하는 민주화운동보상법 제18조 2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를 두고 “대법원이 해야 할 일을 하급심이 했다”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국가나 기득권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경향은 다른 사건들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환경영향평가서 제출 전 기본계획을 승인한데다 주민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며 국방부를 상대로 낸 ‘제주해군기지 실시계획 승인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2012년 7월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한 사례(주심 민일영 대법관)도 있다. 지난해 9월 중소기업들이 “시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고위험 통화 옵션 상품 ‘키코’(KIKO)를 판매하는 불공정행위를 했다”며 시중은행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한 것(주심 박병대 대법관)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부부 사이의 강간죄 성립’을 선언한 판결(주심 신영철 대법관)은 33년 만에 대법원 판례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단 판례 자체가 오래된 만큼 ‘바뀔 게 바뀌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긴급조치 4호 위헌·무효 판결(주심 이인복 대법관)도 1970년대 국가가 언론·출판 및 집회·결사의 자유를 탄압한 데 대한 위헌·무효 선언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과거 긴급조치 1·2·9호 위헌·무효 판결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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