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내곡동 ‘국정원 행킹 사건‘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는 국정원 들머리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해킹 진상규명 노력에 “근거없는 의혹” “정치공세” 성명
이병호 국정원장 결재…직원 상당수는 내용도 알지못해
야당 “어느나라 정보기관이 이런 행동을…여론공작 의심”
이병호 국정원장 결재…직원 상당수는 내용도 알지못해
야당 “어느나라 정보기관이 이런 행동을…여론공작 의심”
‘무명(無名)의 헌신’을 약속한 이들이 ‘국가정보원 직원 일동’이라는 ‘무명’을 내세워 초유의 집단행동에 나섰다. 해킹 의혹에 대한 국회 조사가 임박한 상황에서 “일부 정치인”, “정치적 공세”, “개탄스런 현상” 등 강경한 표현을 동원한 ‘전 직원 성명’을 통해 조직적 반발을 하고 나선 것에 대해 국가 정보기관이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자칫 통제 불능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정원은 19일 저녁 8시35분께 통일부 출입 기자들 이메일로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보냈다.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에는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해킹 프로그램 담당 직원 임아무개(45)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사찰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내용이 담겼다.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백해무익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또 “(동료의) 죽음을 정치적 공세를 이어가는 소재로 삼는 개탄스런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언론과 야당의 진상 규명 노력을 ‘정치 공세’로 깎아내렸다.
‘직원 일동’이라지만 상당수 직원들은 사전에 성명 내용을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직원 수가 많아 전체 회람은 못 했지만 부서별로 공감을 이뤄서 작성한 성명이다. 그간 여러 의혹 제기에 대해 일절 대응을 안 했는데, 동료의 죽음까지도 폄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성명을)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성명 배포는 국정원장 결재를 거쳤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사전에 문안은 보지 못했지만 직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내용은 내부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세계 정보사’에 남을 정보기관의 집단성명은 비판과 우려를 낳고 있다.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수석대변인은 20일 “대체 어느 나라 정보기관 직원들이 공동성명이라는 집단행동을 하겠는가. 지도부가 직원들을 앞세워 여론 공작을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녹색당은 논평에서 “일개 기관이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국기 문란’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국정원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직원 숫자도 비밀인데 ‘직원 일동’으로 성명을 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는 “국정원 대변인실이나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한 입장 표명도 가능한데 사실상 막가자는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논리가 작동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도·감청, 대선 개입, 간첩 증거 조작 사건으로 의혹을 부채질한 게 다름 아닌 국정원 스스로의 과거인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결재한 이 성명을 두고 공무원 집단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 논란도 제기된다. 대법원은 전국교직원노조의 시국선언에 대해 2012년 “공무 외 집단적 의사표현행위”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교조처럼 정부 정책이나 시국에 대한 의사표현도 아니고 자신들의 불법행위 의혹에 직원 일동 성명을 내고 반발하는 것은 유례가 없다. 정부가 일관된 법 집행을 한다면 국정원의 행위도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최우리 이승준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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