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그는 ‘해킹의 달인’이었습니다. 40년 전 실종된 손녀를 알아봐 달라는 한 재벌의 부탁을 받고 비밀수사를 벌이고 있는 기자를 도와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해킹하고, 정보를 마음껏 빼냅니다. 영화 <밀레니엄>의 여주인공 리스베트는 천재적인 해킹 능력으로 기자 미카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줍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도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당장 취재가 막힐 때마다 내게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취재가 술술 풀리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법조팀 서영지입니다. 요즘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국가정보원 해킹 의혹 사건을 보면서 이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지난 5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해킹팀’이 해킹을 당해 400기가바이트에 이르는 대규모의 내부 문서가 공개됐고, 국정원도 해킹팀으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논란이 되자 국정원은 대북 공작용으로 프로그램을 구입했다고 했지만, 해명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의도를 떠나 국가기관이 임의로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은 불법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나나테크’라는 회사입니다. 위키리크스에 이탈리아 해킹팀과 국정원이 주고받은 전자우편이 공개된 뒤 많은 사람들이 나나테크라는 회사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2003년 3월 설립된 나나테크란 업체는 현재 자본금이 1억5000만원으로 직원이 5~6명 정도인 작은 회사였습니다. 설립 당시는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업을 하다가 정보통신설비 유지보수와 보안 서비스 등의 업무가 추가됐습니다. 심지어 나나테크는 한겨레신문사가 위치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걸어서 10~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은 회사가 해킹 프로그램 구매를 중개하게 됐을까요?
저의 궁금증도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국정원-나나테크’ 관계가 알려진 뒤 나나테크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겼습니다. 나나테크 허손구 대표에게 직접 연락을 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랬듯 저 역시 나나테크가 어떻게 국정원과 거래를 했고, 국정원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이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조심스럽게 문자를 남겼고, 답장이 왔습니다. 그는 “내가 조금 아는 것은 국익을 위한 것이고, 그대로 말하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거라고 나름 생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외교적 문제’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가 밝힌 사실은 이러했습니다. 국정원의 해킹 주 타깃은 중국에 있고, “그분들(국정원)의 관심 대상은 오직 휴대폰”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씨가 지난 18일 숨지기 전 지운 파일도 중국과 관련된 파일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허 대표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마도 중국과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주 업무가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허 대표는 이 일을 맡게 된 뒤로 임씨가 숨지기 전까지 그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또 허 대표는 나나테크에는 국정원과 관련된 인물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공동대표인 한아무개씨가 싱가포르의 전시회에 참석해 이탈리아 해킹팀이 판매하는 아르시에스(RCS) 등이 담긴 홍보책자를 국정원에 우편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연락이 와 일이 성사된 걸로 안다”고 했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는 나중에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국정원에서도 인정했듯 국정원이 나나테크를 통해 이탈리아 해킹팀에서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해킹 대상이 누구인지는 국정원이 먼저 스스로 밝혀야 합니다. 허 대표 역시 국정원에서 누구를 해킹했는지에 관해선 “이 부분은 진행한 사람(국정원)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특히 국내 이동통신사인 에스케이텔레콤(SKT) 사용자를 해킹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내국인 사찰 의혹은 커져만 갑니다.
영화에서 해킹의 달인으로 나오는 리스베트는 모두가 매력을 느낄 만한 캐릭터입니다. 그 능력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가 아닌 현실은 다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고발장을 제출해 국정원에 대한 수사는 불가피하게 됐습니다. 이번 수사를 통해 그 내용은 검증되겠지만, 국정원이라는 거대 조직이 나나테크라는 작은 회사에 책임을 미룬다든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최종 책임자만 빠져나가는 결과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영지 사회부 법조팀 기자 yj@hani.co.kr
서영지 사회부 법조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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