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5월엔 음악인들이 좋아하는 시를 소개합니다.
요즘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제의가 내 어릴 적 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오는 곰 발바닥 같다. 나의 방은 그리 크지 않고 조용한데 음악에 몰입해 있을 때 문득 들어오는 곰 발바닥을 향해 ‘치워주시오’ 하기엔 이미 어떤 제의들이 내 기분과 마음에 들어와 있다. 나는 마음이 약해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매니저는 전화를 걸고 각종 제의를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의하는 것인지…. 좌우간 여러 의미가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돈을 버는, 저절로 하게 되는 것들은 남겨져 다행이다. 사실 그것마저 ‘돈 벌면 뭐하지?’ 싶을 때가 있다. 외롭고 우울해지는 63살의 세계가 그렇다. 그러나 자유로운 생활을 40년간 엄청나게 해온 내가 느낀 것은, 함부로 자유로워져도 큰일이라는 것. 모든 길은 새로움을 위해 만들어지는 길이다. 불씨는 숯으로 변하기 직전 가장 반짝거리는데 그 빛이 보통 예쁜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발전은 불씨가 숯으로 변하기 전의 어떤 반짝임이다. 발전은 인간이 가야 할 설정이며 실천이다. 책임과 고통을 감수한 숨은 진리 찾기다. ‘많이 벌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그런 생각들은 삶에 혼란을 부른다. 내가 했던 좋은 일들, 양심을 잊기에.
내가 사는 세상은 마치 싸움 덩어리 같다. 덩어리에서 더 큰 덩어리로. 올망졸망한 것들은 싸움 덩어리 근처에도 못 간다. 내가 사는 세상 범위가 미친 듯 커지고 있다. 진달래꽃이 예뻐도 때에 맞추어 예쁘다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길 바라는데 커다란 싸움통에 원하는 평화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다. 옛 어른들이 만든 이정표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싸우지 마라, 용서해라,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라.’ 이런 이정표가 난리통에 모두 다.
나는 이중인격을 보이며 괴로워하다 이중인격자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알고 있고 그 하나를 버리려 밧줄 하나를 분명히 놨다. 그리고 어느 애쓴 이정표들을 지나다 사평역 눈발의 대합실로 피했다.
너와 내가 사평역에서 지금 만난다면 무엇을 얘기하게 될까. 하고픈 말, 많은 생각을 하고 가다 막상 만나면 우리가 인간이었다는, 나도 잘 몰랐던 엄청난 사실에 아무 말도 못할 거 같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 듣는다면 일단 달래주고 혼자냐 물어보고 눈길을 독고탁처럼 달리든 갈 거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사평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난로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뻔한 얘기라도 그 사람의 말하는 입 솜씨, 세월을 느낄 수 있는… 노래 같은 눈이 내리고 그러나 말은 또 멈추어진다.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침묵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는 있다. 지금 모두 사평역으로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서 뭐라고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얘기는 없다.
눈은 옛것을 하얗게 덮어주는 거 같아서 좋기도 하다. 누구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여백이라고 써 있었다. 난로불을 지필 때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불쏘시개의 연기가 못 오게 손으로 치우고 손으로 입을 막고 후후 분다. 그리고 또 신기하게 불은 반짝반짝거리며 숯이 되고 그리고 그 숯은 다시 또 가장 옳은 것, 좋은 것이 되어 내 온몸에 붙어 이정표가 만들어진다. 거기에 묵묵한 사랑이 푸짐하게 있다.
전인권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