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검찰의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 ‘사법 농단’ 의혹 수사가 법원의 자료 제출 지연으로 일주일째 답보 상태다. 수사 협조를 약속한 대법원이 임의제출할 자료를 걸러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자용)는 지난 1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임종헌 전 차장을 비롯한 의혹 관련자의 △업무용 컴퓨터 하드디스크 △업무추진비 내역 △메신저 및 이메일 사용 내역 △관용차 운행일지 등을 법원행정처에 요청했다. 삭제되거나 물리적 손상을 이유로 사법부가 확인하지 못한 파일 수만건을 복구하고, 재판 거래 의혹 당사자들의 과거 동선을 확인하기 위한 ‘기초 자료’들이다.
그러나 법원행정처 쪽은 25일에도 “검찰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방대한 자료를 모두 검찰에 제공하면 자칫 법령 위배 소지가 있다”며 검찰이 요청한 자료를 있는 그대로 넘길 수는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법원 내부에서도 대법원이 임의제출한 자료의 증거능력이 문제 될 수 있어 ‘최소한의 선별 제출’ 필요성을 거론하고 있다.
반면 법률 전문가를 상대로 하는 수사인 만큼 ‘사실관계’를 최대한 복원하기 위해 자료 제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 법원 자체 키워드 검색 때 빠진 추가 의혹 확인해야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대법원이 자체적으로 꾸린 특별조사단(특조단)의 3차 조사결과가 발표된 이후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특조단은 키워드 검색 방식으로 410개 컴퓨터 파일을 추출해다. 그로 인해 케이티엑스(KTX),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쌍용차, 키코 등의 판결이 상고법원을 매개로 한 ‘재판 거래’에 이용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케이티엑스’ 등 다른 키워드로도 검색해 볼 필요가 새롭게 제기된다. 또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추가 의혹들이 확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드디스크가 ‘통’으로 필요한 이유다.
■ 증거능력 고려…문건 작성 의사결정 과정 밝혀야
법원이 비밀침해, 직권남용 등의 시비에 휘말리 수 있어 자료를 ‘선별’해 검찰에 제공해야 한다는 법원 내 기류도 감지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정식 재판으로 넘어갈 경우 해당 자료들의 증거능력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수사 선상에 오른 관련자들은 각종 판례에 정통한 전·현직 최고위 법관들이다. 자신의 혐의나 관련 자료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각종 문건에 대한 정확한 디지털포렌식 절차가 필요하고, 메신저 등에 남은 법원행정처 내부 의사결정 과정의 단서들을 일일이 맞춰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기관도 열람할 수 없는 문건을 법관회의는 열람할 수 있다는 식이다. 보통의 사건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태도”라고 꼬집었다.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임종헌 전 차장 등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만났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그 시기 임 전 차장이 관용차로 어디로 이동했고 업무추진비를 사용했다면 어느 장소에서 집행이 이뤄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검찰, 자료 확보 못하면 압수수색 영장 등 강제수사 검토
또 상당수 삭제된 파일에 대해 사법부 자체 조사단이 복구에 실패한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난해 2월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던 김아무개 판사가 인사 이동이 예정된 날 새벽 자신이 쓰던 컴퓨터에서 2만4500개 파일을 삭제한 사실이 확인됐다. 검찰로서는 파일 삭제 이유와 함께 삭제된 파일을 복구해 내용물을 하나하나 확인할 필요가 충분한 셈이다. 한 법조인은 “법원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려면 한 점 의혹도 남지 않도록 최대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전문기관이 아닌 법원이 복구에 실패했다고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지적했다.
검찰은 일단 법원의 자료 제출을 기다려본다는 방침이다. 다만, 임의제출한 자료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압수수색영장 청구도 검토하기로 했다. 검찰 관계자는 “통상적인 절차대로 수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