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을 지휘한 의혹을 받고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해 9월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했던 대법원 특별조사단(특조단)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을 둘러싼 ‘재판 거래’ 의혹을 조사하면서, 4년 전 바뀐 대법원 배당 예규를 무시한 채 “문제없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확인됐다. 결론에 맞춰 조사하다 보니, 조사 때 확인할 수 있는 문제점에도 눈을 감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난 5월말 조사보고서를 공개한 특조단은 조사 때 대법원으로 올라온 원 전 원장 사건의 배당 조작 여부를 살펴봤다. 앞서 2015년 2월 서울고법은 원 전 원장의 정치개입을 인정해 선거법 혐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5개월 뒤 ‘만장일치’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했다. 통상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소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때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기 때문에 이런 만장일치는 그 자체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특조단 조사에 앞서 지난 1월 대법원 자체 조사 때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항소심 판결에 불만을 나타내며 ‘신속 처리’와 ‘전합 회부’를 요구했다는 법원행정처 문건이 공개되면서 의혹이 커진 상황이었다. 그해 가을 퇴임을 앞둔 민일영 전 대법관에게 이 사건이 배당된 것도 ‘신속 처리’를 위한 포석일 수 있다는 의혹까지 일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조단은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온 뒤 ‘선거법 사건’ 카테고리로 분류되지 않고 ‘일반 구속사건’으로 분류돼 민 전 대법관이 속한 대법원 3부에 배당된 사실을 확인했다. 배당 당일 선거법 위반으로 분류된 사건은 2건에 불과했다. 원 전 원장 사건이 선거법 사건으로 분류됐다면 배당 순서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던 이인복 전 대법관이 속한 대법원 1부에 배당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특조단은 이런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고 “조작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선거법이 아닌 일반 구속사건으로 분류한 것은 단순히 “실수”였고,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분류됐더라도 중앙선관위원장이 속한 소부에 선거법 사건을 배당하지 않는 대법원 예규에 따라 배당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겨레> 취재 결과, 관련 예규는 이미 1년 전인 2014년 2월에 ‘선관위가 직접 고발한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중앙선관위원장이 속한 소부에도 배당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배당 실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특조단이 4년 전 사라진 예규를 활용해 의혹을 일축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법원은 “예규가 바뀐 뒤에도 실무 차원에서는 여전히 과거 예규를 따른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개정 예규에 따랐다면 대법원 1부에 배당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특조단은 ‘무작위 배당’ 시스템에 따라 애초 선거법 위반으로 분류됐어도 특정 소부 배당은 ‘확률’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의 정통성 문제가 걸릴 만큼 첨예한 사건을 ‘선거법 위반’이 아닌 ‘일반 사건’으로 분류하게 된 경위는 검찰 수사로 분명히 규명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조단이 면밀하게 검증하지 못한 부분은 또 있다. 2015년 9월, 법원행정처는 대법원 소부 판결과 달리 긴급조치 국가배상판결을 내린 김아무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 및 ‘재발방지책’의 일환으로 ‘사건 신속처리(패스트트랙) 개발’을 검토했다. 실제 그해 10월15일 ‘적시처리가 필요한 중요사건의 선정 및 배당에 관한 예규’가 법원장 등의 적시처리 사건 선정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6년 만에 개정됐다. “대법 판결을 위반하는 하급심 사건의 신속 처리”라는 문건 목적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예규 개정권을 가진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결재 다음날인 그해 10월16일 이 내용을 법원 내부망에 공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조단은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다른 방안들이 실제 실행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
한편 특조단 단장이었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업무보고에 나와 “재판을 두고 거래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라면서도 “재판 거래가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나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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