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6월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나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김명수 대법원장이 다음달 27일 취임 1년을 맞는다. 양승태 사법부의 전방위적 ‘사법농단' 의혹 진상규명,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 확립 등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진척이 더디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임명된 고위 법관들에 포위당했다는 ‘동정론'도 시효가 다했다는 지적이다. 국민들의 기대와 달리 법원행정처와 상당수 법관들은 여전히 ‘조직방어’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승 원장 얘기가 왜 나온 건가요? 대법관 되는 걸 막으려는 반대세력들의 전략인가요?”
검찰이 ‘사법농단’ 수사 군불을 때던 지난 7월초, 한 고위 법관이 기자에게 건네온 질문이다. 한승 전주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2014년 2월~2016년 2월)을 맡을 때 정책실에서 만들어진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압박 방안 문건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였다. 한 원장은 대법관 후보로 추천된 상태였다. 이 문건에는 상고법원에 반대하던 변협을 압박하기 위해 변호사들의 변론 연기 요청을 불허하고 증거 제출을 제한하는 등 국민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자는 “애초 대법원이 책임자인 실장을 조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게다가 최고 법원 판사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번엔 한숨과 함께 “한 원장이 ‘양승태 사람’으로 분류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안타깝다. 대법관은 물 건너 간 게 아니겠느냐”는 법관의 답이 돌아왔다. 사법농단 진상 규명 요구를 조직 내 경쟁세력의 ‘전략’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수준의 인식이 이 고위 법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장님 다칠까 걱정”
대법원 자체 조사단인 특별조사단이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 조사 결과를 발표한 지난 5월25일 이후 약 석 달 동안 법원은 줄곧 아노미 상태다. 처음엔 고법부장 이상 고위 법관들의 반발이 거셌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수사 촉구 시 재판 독립이 침해될 것”이라고 의결했고, 전국 법원장들은 “‘재판거래’ 의혹은 근거 없다”고 선언했다.
“검찰이 법원의 ‘멱살’을 쥐고 압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머지않아 김 대법원장도 후회할 수 있어요. 두고 보세요.”(한 법원장)
처음에는 고위 법관들의 반발이 걸림돌로 보였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법원 안팎에서는 김 대법원장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검찰 수사가 진행된 지난 두 달간, 김 대법원장이 새로 법원행정처에 발령낸 판사들도 고위 법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입모아 “이러다 법원이 무너진다”고 했다. 누군가는 “대법원장님이 다칠까봐 우려된다”고 에둘러 표현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검찰 요구를 받아들이면 법원의 검찰 견제 기능이 약화돼 국민들이 손해볼 것”이라고 포장했다. 이들 상당수는 양 대법원장 시절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법개혁을 요구해온 당사자들이다. 하지만 ‘안방 지키기’에 급급하다는 점에서, 상당수 판사들은 너나 없이 한 몸이었다.
#장면 1 “파견을 갑자기 중단하면, 한 판사의 인생이 타격을 입을 수 있어요.”
애초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주유엔대표부에 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 결론을 미루는 대가로 해외 공관 파견 자리를 얻어냈다는 의혹이 불거진 바로 그 자리였다. 발령 시점도 ‘재판거래’ 의혹이 처음 언론에 보도(7월23일)된 뒤였다. 법원행정처 관계자에게 “파견 적절성 여부를 논의했느냐. 파견 중단을 고려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점(적절성)은 논의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이미 선발이 통지됐다. 돌연 중단하면 당사자도 피해볼 수 있다”는 취지로 답했다.
“공적 마인드가 없는 거죠. ‘양 대법원장 때 일이니, 우리는 상관없다’는 생각이라면, 국민들은 ‘양승태 대법원장이나 김명수 대법원장이나 똑같다’고 받아들일 겁니다.”(서울 지역 한 판사)
결국 법원은 최근 외교부로부터 파견 절차 진행을 보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야 관련 절차를 잠정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면 2 “옥석을 가려야 한다.”(법원행정처 한 관계자)
‘사법농단’ 수사가 본격화되며 특별조사단 보고서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판사들까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법원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검찰 수사가 법원 압박을 위한 ‘별건수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말은, 특별조사단이 ‘악의 축’으로 정리한 판사와 “시키는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인 판사를 구분하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특별조사단은 스스로 ‘옥석 가리기’에 실패했다. 평판사인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을 보고도 ‘윗선’을 조사하지 않았다. ‘사법농단’ 사태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일탈행위’로만 정리하고, 사법행정 최종 책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은 조사조차 안 했다. 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 ‘재판거래’ 문건에 대해서는 애초 취지와 달리 “상고법원과 관련성이 없어 조사하지 않았다”는 해명을 내놨다.
“수사 과정에서 혐의가 새롭게 드러난 판사들의 가담 정도가 조사단 보고서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옥’이고 ‘석’인지는 수사가 끝난 뒤 밝혀지겠죠.”(검찰 관계자)
#장면 3 “심리불속행(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지난 20일 밤 10시, 대법원 관계자가 출입기자단 카카오톡 대화방에 급히 입장을 냈다. 징용 사건에 대한 언론의 비판 중 일부는 근거 없다는 취지였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다. 사건은 같은 취지의 하급심 판결을 거쳐 일본 기업의 재상고로 2013년 8월 대법원에 다시 접수됐다. 별다른 사정 변경이 없었던 탓에 심리불속행(상고심 접수일로부터 4개월)으로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다수 언론이 지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징용 ‘재판거래’ 의혹이 나온 지 한 달이 되어서야 “심리불속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반박했다. 심리불속행 여부를 판단하려면 일본 기업 쪽이 상고 기록 접수 통지서를 받고 상고이유서까지 내야 하는데, 국외송달 과정이 지체되며 2014년 5월에야 일본 기업이 통지서를 받게 돼 이미 실기했다는 게 대법원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반쪽 해명’이었다. 대법원이 재상고 접수 통지서를 보낸 것은 2013년 11월22일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심리불속행 만기를 20일도 채 안 남긴 시점이었다. 대법원 스스로 소송 지연을 방기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뺀 것이다.
다시 비판이 일어나자 대법원은 추가 해명에 나섰다. “통지서 일본어 번역 과정이 오래 걸렸다”, “앞선 재판보다는 빨리 통지한 편이다”는 내용이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의 입장인지 전범기업 대리인의 입장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꼬집었다.
“판사들은 신뢰와 권위를 ‘거저’ 먹어 왔습니다. ‘안방’이 털리고 치부가 드러나 재판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그간 누려온 권위도 잃게 되니 자꾸만 현실을 외면하는 거죠. 현실을 알고도 부인하면 ‘정신승리’고요.”(한 단독판사)
양승태 대법원이 내부 이견은 징계나 인사 불이익으로 ‘진압’하고 국민 비판은 철저히 ‘외면’했다면, 김명수 대법원은 조직을 방어하기에 바쁘다. 김 대법원장 취임 뒤 두 차례 조사를 벌이고도 ‘사법농단’의 진상을 말끔히 규명하지 못했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관련 문건을 ‘찔끔찔끔’ 공개한 게 단적인 예다.
“법원 내부에서 김 대법원장 책임론이 대두되니까 위축된 끝에 ‘엇박자 변명’을 만들어내는 거죠. 개혁적인 판사들도 사업행정을 맡으면서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법원을 위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조직 이기주의에요. ‘양승태 사람’이든 ‘김명수 사람’이든 마찬가지고요.”(한 단독판사)
일제강제 동원 피해자 이춘식(98)씨가 지난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양승태 대법 재판거래 규탄 및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소송 전원합의체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회견문을 제출하기 위해 청사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영장판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
‘조직 이기주의’는 일선 법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서울중앙지법의 영장판사들이 지난 한 달간 ‘사법농단’ 수사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며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법원행정처의 임의제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7월27일)
“일개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8월2일)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상관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8월10일)
검찰이 반발하자 지난 2일 법원은 “영장 기각과 상관없이 수사 협조는 합리적 범위 내에서 계속 이뤄질 것”이라는 공식 입장도 냈다.
이런 태도에 대해 평소 영장을 깐깐하게 심사해온 판사들조차 ‘안방 지키기’라고 지적한다. 특히 비판이 모이는 지점은 두 가지다. 먼저 영장 기각 사유에 단골로 거론되는 ‘임의(자진)제출 가능성’이다. 현재 검찰은 법원행정처의 기획조정실을 제외한 사법정책실·지원실 등 자료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행정처의 임의제출이 안 돼 강제수사에 돌입했는데, 일선 법원에서 또다시 임의제출 가능성을 방패로 내세운 것이다.
법원이 ‘수사 협조’를 약속한 대목도 논란거리다. “영장심사는 법원의 적법한 권한이자 의무입니다. 법원(영장판사)이 ‘협조’라는 말을 내세우는 것은 아직도 행정처와 ‘협의’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한 부장판사)
반면 정작 ‘수사 협조’ 당사자인 법원행정처는 ‘재판하듯’ 자료를 선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의제출은 말 그대로 ‘자진제출’이기에 행정처 의사가 중요하지만, 행정처가 내세우는 “혐의가 특정되지 않아 제출하기 어렵다”는 제한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법조인들의 지적이다. “‘혐의 관련성’을 판단하는 건 수사기관입니다. 영장판사는 행정처처럼, 행정처는 영장판사처럼 사고하고 있어요.”(한 단독판사)
‘신영철 사태’ 때보다 위기인데…
법조계 관계자들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모습”이라고 말한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9월 취임 직후 첫 인사에서 사법행정 실무 책임자인 김소영 행정처장(대법관)을 유임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임명된 김 대법관은 행정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법개혁 열망을 안고 취임한 김 대법원장이 행정처의 ‘얼굴’부터 바꾸지 않는 것을 두고 우려가 나왔다. 김 대법원장은 김 대법관이 ‘사법농단’ 조사에 소극 대응한 게 확인된 지난 2월에야 처장을 교체했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인적 청산 없이 개혁을 꾀한 것부터 실책”이라고 꼬집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독선적 방식이 ‘사법농단’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내부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에는 저항이 따르고, 때에 따라 정면돌파할 필요가 있습니다.”(한 판사 출신 변호사)
‘사법농단’ 뒷처리도 비판을 부른다. 현직 판사 13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지만, 각종 ‘재판거래’ 의혹은 징계 회부 사유에서 제외했다.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징계 절차도 잠정 중단했다. 한 판사는 “수사 과정에서 의혹이 새롭게 나온 사안은 대법원이 자체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데도, 윤리감사관실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며 “손 놓고 있는 건 진상 규명을 바라는 자세가 아니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은 주변 판사들에게 2009년 신영철 대법관 사태(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시위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당시 어설프게 타협해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법원 안팎에서는 당시 행정처에서 ‘신 대법관이 무너지면 이용훈 대법원장이 무너진다’는 방어논리를 내세운 탓에 내부개혁도 끝내 실패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지금 법원은 당시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위기 상황입니다. 국민의 신뢰가 아닌, 불신을 기본값으로 놓아야죠. 신뢰를 입증할 책임은 판사들에게 있고요.”(한 판사)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낮다는 지적에 겸허히 귀 기울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농단의 책임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있되, 앞으로의 사법개혁 의무는 김 대법원장에게 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