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집 인근 놀이터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파문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한 뒤 자리를 뜨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2015년 11월25일, 전주지법 출입기자단에게 이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법원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원의 의원직을 유지하는 판결을 내린 날이었다. 이메일에 첨부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문건에는 “정당해산결정에 따른 국회의원, 지방의원 직위 상실 판단 권한은 법원에 있다고 선언한 부분은 헌재의 월권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의원직까지 박탈했는데, 법원행정처는 이를 ‘헌재의 월권’이라고 본 것이다.
헌재를 깎아내리는 내용의 내부 문건이 기자단에 유출되자 행정처는 온종일 ‘비상사태’였다고 한다. “문건 내용은 정책실 심의관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혼자 작성한 문건에 불과하다”고 정리한 뒤, ‘헌재 달래기’에도 나섰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헌재 고위 관계자를 찾아 “‘헌재의 월권’ 운운은 심의관 개인 의견일 뿐, 행정처의 공식 의견은 절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이 고위 관계자는 “당시 임 전 차장이 방문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하면, 임 전 차장의 이같은 해명은 거짓으로 파악된다. 행정처는 2014년 말부터 실·국을 망라한 긴급 티에프(TF)를 꾸려 통진당 소송 대책을 강구했다. 임 전 차장은 기획조정실장 근무 시절부터 이를 지휘한 당사자였다.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직까지 박탈하기 위해 ‘기획소송’을 내는 계획이나, 전주지법 재판부에 선고기일 연기와 판결문 내용까지 ‘주문’한 내용은 임 전 차장에게 고스란히 보고됐다.
당시 대법원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헌법과 법률이 아닌 헌재와의 ‘위상경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황도 이미 드러났다. 통진당 소송 관련 행정처 문건 곳곳에는 “의원직 상실 결정은 헌재의 권한 없는 결정”, “(판결 선고시) 헌재의 논거를 그대로 차용한 듯한 인상은 회피할 필요” 등 내용이 나온다.
이보다 2주 앞서 서울행정법원이 통진당 국회의원들이 의원직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을 때도 행정처는 ‘비상사태’였다고 한다. 당시 법원은 “국회의원직 상실은 헌재가 헌법 해석·적용에 대한 최종 권한으로 내린 결정”이라며 ”법원은 이를 다투거나 다시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국회의원직 상실 결정은 헌재의 월권’이라는 행정처 내부 지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당시 행정처 근무 판사들은 최근 검찰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격노’해 대책 마련을 강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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