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대법원 재판자료를 무더기로 반출한 전관 변호사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연거푸 기각되면서, ‘사법농단’ 영장을 심사하는 서울중앙지법 영장판사들의 공정성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 심사는 이 전관 변호사와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는 부장판사가 맡았다. 영장이 거듭 기각되는 가운데 서둘러 ‘문건 회수’ 카드를 내민 대법원 역시 논란에 불을 질렀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10일 유해용(사법연수원 19기) 전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 재판기록 유출 영장을 무더기 기각한 박범석(26)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014년 대법원에서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박 판사는 김창석 대법관 전속연구관, 유 변호사는 수석연구관에 이어 재판연구관실 업무를 총괄하는 선임연구관이었다. 전속연구관은 공동연구관만큼 수석·선임연구관과 상시적으로 소통하진 않지만, 여전히 긴밀하게 접촉한다. 대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일종의 ‘선발성 인사’로서, 같은 공간에서 논의하고 토론하는 연구관들은 유대감이 상당한 편이다”고 짚었다.
법조계에서는 박 판사가 유 변호사 사건을 맡지 않는 게 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판사는 “통상 영장은 순서대로 배당되긴 하지만, 배당 이후에라도 판사 스스로 사건배당권자 등에게 회피·재배당을 요청할 수 있다”고 했다. 형사소송법은 법관이 피고인과 친족, 대리인 등이거나 ‘불공정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을 때’ 해당 업무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또 법원 내부에는 ‘제반사정을 고려해 필요한 경우’ 형사수석부장 결정에 따라 사건을 재배당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일종의 ‘상급자’인 선임연구관의 경우 ‘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염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게 복수의 판사들의 지적이다.
‘사법농단’ 의혹 대상자들과 영장판사들의 긴밀한 인연이 논란거리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부장판사는 지난달 26일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소송 자료 유출 의혹 관련 유 변호사에 대한 1차 영장도 기각한 바 있다. 지난달 23일에는 자신이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으로 일할 당시(2017년) 형사수석부장으로 근무한 신광렬 서울고법 부장판사 영장도 기각했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조인이 재판 대상이 된 경우, 법원은 ‘제 식구 감싸기’ 시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인다. 지금은 법원이 외관의 공정성조차 신경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앞서 검찰의 고발 요청이 접수된지 하루 만에 ‘회수’ 카드를 내민 대법원 역시 논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검찰은 지난 6일 밤 ‘문건 유출’ 의혹 관련 유 변호사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자 대법원에 고발을 요청했다. 대법원은 다음날 오후 4시께 “고발은 부적절하다”면서 ‘회수 등 필요한 조치 검토’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회수의 법적 근거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그 근거가 될 만한 규정은 ‘공공기록물관리법’인데, 유 변호사가 반출한 자료를 ‘공공기록물’이라고 보고 회수를 요청하면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이 아니다”는 영장판사의 판단과 충돌하게 되고, 영장판사와 마찬가지로 공공기록물이 아니라고 보면 회수의 근거가 마땅치 않게 된다는 딜레마가 생긴다는 지적이 판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한 판사는 “법원은 강제수사 권한이 없어 유 변호사의 ‘자발적’ 반납이나 파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초 해당 자료를 핵심 증거물로 보는 검찰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짚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오후 입장을 내고 ‘영장심사 지연’ 의혹 진화에 나섰다. 유 변호사 압수수색 영장은 지난 7일 밤 청구됐는데, 지난 8일 토요일 영장 업무를 담당한 영장판사 2명(이언학, 명재권 부장판사)이 판단내리지 않고 10일까지 미루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고의적 지연’ 논란이 일었다. 법원 관계자는 “이언학 판사의 경우 유 변호사 관련 영장을 기각한 전례가 있어 사건 처리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고, 명재권 판사는 구속영장 업무를 담당해 압수수색 영장 업무까지 처리하기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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