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법원이 지난주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등 3명의 재판에서 일제히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직권남용죄는 ‘사법농단’ 관련 빈번히 언급되는 죄명이다. 검찰의 부담이 커졌다는 관측과 함께, 법원이 사법농단 재판 대비에 나선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법원은 지난 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김백준 총무비서관 등에게 다스 소송 등에 대한 대응방안 마련을 지시한 것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보수단체 지원을 요구한 것(서울중앙지법),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에게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한 직원 채용을 압박한 것(수원지법 안양지원)을 무죄로 봤다.
법원 판단의 핵심은 이들의 요구가 부당할 수는 있지만, ‘직권’(직무권한)은 아니라고 본 대목이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하는데,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라도 개별 소송 대비나 민간단체에 자금 지원을 요구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법조계에서는 이들 판결이 ‘사법농단 무죄’ 포석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법농단 의혹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법원행정처 차장이나 심의관 등을 통해 일선 법관에게 재판 지연(징용소송), 선고기일 연기(통합진보당 소송), 판결 번복(한정위헌제청 사건) 등을 주문한 구조다. 5일 판결대로라면, “사법행정과 재판업무는 원칙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재판에 개입할 직권 자체가 없다”는 판단이 나올 수도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대법원장은 인사를 담당하는 사법행정의 수장으로서 법원의 모든 활동에 대한 사법행정 권한이 있고, 행정처의 재판개입 역시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행사를 ‘빌미'로 한 ‘일반적 직무권한'의 남용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다수 판사가 입모으는 지점이다. 대법원은 직무권한의 법적 근거가 없어도, 법·제도를 종합적으로 봐서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해석'될 경우 ‘일방적 직무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줄곧 인정해왔다. 2011년 해군본부 법무실장이 국방부 검찰수사관에게 군내 내부비리 수사기밀을 보고하도록 한 사례에서도, 지시의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일반적 직무권한’을 남용했다고 넓게 해석해 유죄를 확정했다.
‘사법농단’ 수사의 한 갈래인 통합진보당 사건의 경우, 행정처가 ‘국정감사 대비’라는 명분을 동원해 선고기일 연기 등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원 수석부장판사가 영장판사로부터 보고받은 검찰 수사상황을 행정처에 ‘직보’한 것도 영장 ‘결과’에 대한 보고의무를 핑계로 수사기밀까지 파악한 남용행위로 평가 가능하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재판개입권’이라는 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재판개입은 사법행정권을 동원한 결과다. 국정감사 대비, 기관 협조 등 사법행정을 핑계로 댔다면, ‘제왕적’ 수준인 대법원장의 ‘일방적 직무권한’이 남용된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 (이 전 대통령 등 판결은) 일반적 직무권한의 범위를 좁혀 해석한 것 같다”고 짚었다.”고 짚었다.
‘직권남용’ 피해자를 일선 판사가 아닌 행정처 심의관으로 볼 경우, 입증은 한결 수월해진다. 심의관들에게 부적절한 문건 작성을 지시한 행위 자체가 직권남용이 된다. 통합진보당 지역구 지방의원들을 상대로 ‘기획소송’을 내는 계획을 짜는 등 정당한 행정처 업무를 넘어선 문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