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5일 오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임 전 처장 뒤로 세종호텔 노동조합원 등이 구속 촉구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농단을 수사하는 검찰이 수사 착수 127일 만에 재판거래 등의 핵심 실무를 맡았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23일 밤 임 전 차장에 대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 비밀누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국고손실, 허위공문서작성, 위계공무집행방해, 직무유기,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영장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사법농단 수사에서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9월20일·기각)에 이어 두 번째다.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는 오는 25일께 열릴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지난 15~20일 임 전 차장을 네 차례 불러 조사했다. 임 전 차장은 수사 대상인 주요 의혹에 대해 “몰랐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이 때문에 검찰은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요청에 따라 일제 강제징용 사건 민사소송을 의도적으로 미루는 방안을 만들었다는 혐의(직권남용)에 대해 “외교부 등 관계자를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차한성·박병대 전 대법관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났는지 당시 전혀 몰랐다. 이번에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임 전 차장은 각종 재판개입 사안에서는 행정처 심의관 등 하급자에게 책임을 미루는 진술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행정소송 때는 행정처 심의관에게 고용노동부 쪽 소송서류를 사실상 대필해주도록 한 혐의(직권남용)를 받고 있는데, 임 전 차장은 “심의관이 과장한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부산 법조비리 사건을 은폐한 혐의(직무유기)와 향후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련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에 대해서도 “윤리감사관실 등에서 알아서 한 거고 나는 중간결재자일 뿐”이라는 진술을 내놨다고 한다. 심의관들에게 차성안 판사 등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진하는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 뒷조사를 시킨 혐의(직권남용)에 대해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여서 검토시킨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고 한다. 이밖에 박 전 대통령 측근이 당사자인 재판의 소송 문건이나 최순실씨가 연루된 직권남용죄 관련 검토보고서를 청와대에 보낸 혐의(공무상 비밀누설)에 대해서도 “기밀문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이 이처럼 일관되게 책임을 부인하는 데다, 수사 개시 직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차명폰’을 만들어 관계자들과 말 맞추기를 시도한 정황 등에 비춰 증거인멸 우려도 크다고 봤다.
그의 구속 여부는 사법농단 수사의 속도와 처벌 범위를 가늠하는 핵심 잣대가 될 전망이다. 임 전 차장이 구속되면 ‘윗선’ 수사에 속도가 붙게 된다. 법원이 ‘혐의가 상당 부분 소명됐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내주면, 임 전 차장으로선 책임을 혼자 떠안을 이유가 적어진다. 이미 일부 재판거래, 재판개입 사안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차한성·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이 개입한 정황이 나온 상황어서 ‘덤터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은 임 전 차장 구속영장에 양 전 대법원장(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조성 의혹, 헌법재판소 기밀유출, 한정위헌제청 결정 번복, 법관 사찰 등)과 박·고 전 대법관 등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서울중앙지법이 임 전 차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 자체조사에서도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했던 임 전 차장의 구속수사 필요성을 법원이 인정하지 않을 경우, 윗선으로 올라가기 위한 수사에 시간이 더 들거나 아예 윗선 수사가 막힐 수도 있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법원의 잇단 사법농단 관련 영장 기각을 비판하는 지적이 쏟아지기도 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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