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으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 농단 사태의 발단이 됐던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의 실체와 실제 이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증거 자료가 지난 6일 법원행정처 캐비닛에서 튀어나오면서, 지난해 3월 이후 세차례나 진행됐던 대법원의 자체 진상조사가 사실상 직무유기에 가까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이 1년8개월 동안 못 찾은 자료를 검찰이 하루 만에 뚝딱 찾은 셈이어서, 당시 진상 조사 책임자들의 은폐 의혹마저 불거지고 있다. 검찰은 당시 대법원 자체 조사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볼 계획이다.
25일 <한겨레> 취재 결과,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행정처 인사 부서 관계자들은 “올해에는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 문건은 작성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이 문건은 매년 1월 작성됐던 것으로, ‘양승태 대법원’에 비판적이었던 송승용, 문유석, 김동진 판사 등 ‘멀쩡한’ 법관에게 불이익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까지 작성된 문서가 올해부터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에 비춰, 행정처가 ‘부적절한’ 문건의 존재를 파악했고 이에 따라 작성을 중단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그동안 검찰에 자료 제출 등을 거부해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지난 6일 영장에 의해 인사 제2심의관실에서 제출된 것들이다. 인사 제1심의관 및 인사총괄심의관실 자료는 아직도 봉인돼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지난 6월 수사에 착수한 이후 행정처는 줄곧 ‘인사자료를 내주면 인사상 정보가 드러나 큰일이 난다’고 했는데, 이렇게 블랙리스트를 만든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은 세차례에 걸친 대법원 ‘셀프조사’ 과정에서 위법성이 있었는지 확인해볼 계획이다. 불법이 행해진 것을 알고 이를 고의로 덮었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할 수 있다는 취지다. 수사팀 관계자는 “조사가 어떤 방식으로 된 것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렇게 발끈하고 나선 것은 ‘캐비닛만 열어봐도 나오는 자료를 당시 대법원이 몰랐다는 게 상식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년 넘게 세차례나 진행된 대법원 조사의 핵심 목적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었고, 최근 쟁점이 된 ‘재판 개입’ ‘재판 거래’ 의혹은 주된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난 5월25일 3차 조사를 이끌었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대법관·특별조사단장)은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해 그들에게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부과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단정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관계자는 “수사 중인 사안이라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 문건이 올해부터 작성이 안 됐는지, 왜 안 됐는지 등에 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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