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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위에서 시켰다’는 사법농단 판사들, 무더기 기소되나

등록 2018-12-09 15:04수정 2018-12-09 20:53

“밑에서 알아서 한 것” 박병대·고영한 구속영장 기각 후폭풍
‘시스템 범죄’라며 수뇌부만 겨냥했던 수사전략 수정 불가피
임종헌 공소장에 등장하는 ‘피의자성’ 전·현직 판사만 수십명
“묵과할 수 없는 범죄인데 아무도 책임 안지는 코미디 같은 상황”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농단 사태의 ‘머리’ 격인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지난 7일 기각되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재판개입 및 법관사찰을 실행에 옮긴 ‘손발’ 구실을 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하 실무자들과의 ‘공모관계가 의심된다’는 것이 영장판사가 밝힌 기각 사유였다. 당시 행정처 심의관은 물론 임 전 차장까지도 검찰 조사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지만, “밑에서 알아서 한 것”이라고 혐의를 부인한 두 전직 대법관의 말이 더 믿을 만하다고 본 셈이다.

9일 검찰 핵심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번 사건을 ‘시스템상 지시관계에 따른 범행’이라고 규정하고 당시 사법부 수뇌부로 수사력을 집중하던 전략에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간 ‘피의자성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이 우려돼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했던 당시 심의관 출신 전·현직 판사들을 재판에 넘기고 일부 가담 정도가 심각한 경우엔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수사팀 한 관계자는 “‘지시를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법원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행정처 심의관들에 대해 어떤 처분을 할지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언급된 사법농단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심의관급 판사들만 100명 정도다. 이 가운데 2014년 통합진보당 재산 가처분소송 때 행정처의 ‘재판 지침’을 전달하려 18개 재판부에 일일이 전화를 했던 최아무개 판사(당시 사법정책심의관)나 2014~17년 ‘양승태 사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멀쩡한 판사를 정신병자로 몰았던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라는 제목의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인사총괄심의관 출신 김아무개 판사 등은 가담 정도가 중대하다는 것이 검찰 판단이다. 아직 후배 판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큰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이 영장심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점 역시 수사팀 입장에선 큰 부담이다. 그간의 진술을 번복하는 등 ‘증거인멸’ 가능성도 제기된다.

■ 수뇌부 지시는 정당했는데, 실무자들 오해로 재판개입·법관사찰?

무엇보다 이번 영장 기각으로 지난해 3월 이후 1년9개월가량 이어져온 사법농단 사태가 정확한 ‘윗선’을 못 밝히고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 일단 박·고 두 전직 대법관이 효과를 톡톡히 본 “밑에서 알아서 했다”는 입장을 번복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직접 보고했다는 구체적 진술에도 영장판사들은 두 사람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6일 영장심사 과정에서 영장전담판사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나 (행정처) 심의관들은 지시를 받아 보고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고 전 대법관은 “문건이 있다고 해서 다 보고받은 건 아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고영한 전 대법관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고영한 전 대법관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더욱이 다른 3명의 영장판사들은 두 전직 대법관과의 근무 인연 등으로 이 사건을 피하고 있어 검찰이 영장을 재청구하더라도 이번에 영장심사를 진행한 임민성·명재권 영장전담판사가 다시 맡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사법농단 관련 다른 혐의가 추가되고 실무자들의 진술이 더 폭넓게 확보되더라도 두 영장판사의 ‘공모관계 의문’은 풀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법원을 중심으로 나온다. 결국 양승태·박병대·고영한 등 수뇌부는 정당한 지시를 했는데 실무자들이 이를 오해하거나 과잉 충성을 해서 재판에 개입하거나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이상한 결론이 날 수도 있다.

검찰 핵심 관계자는 “지금까지 나온 수사 결과만 봐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라는 공식 조직에서 업무시간에 공무를 수행한다며 묵과할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라며 “결국 어느 선까지 책임지느냐의 문제만 남은 상황에서 아무도 책임 안 지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 박·고 전 대법관 불구속은 불가능한 선택…대대적인 보강수사 전망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검찰이다. 일찌감치 사법농단 사태의 주범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수뇌부로 지목하고 직속 부하인 임 전 차장을 구속한 상황에서 박·고 두 전직 대법관을 불구속 기소한다는 건 수사 논리상 거의 불가능한 선택이다. 강제징용 소송에서 자신이 재판장(대법원 전원합의체)을 맡을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전범 기업 쪽을 만나 소송서류 작성 지침을 주고 초안까지 감수해주도록 한 양 전 대법원장 역시 책임을 임 전 차장 등 실무자들한테 미룰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검찰이 역량을 총동원하는 대대적인 재수사·보강수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건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이 포토라인에 서는 일도 한참 뒤로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심의관들은 ‘위에서 시켰다’고 하고 임 전 차장은 ‘자기가 한 일은 죄가 안 된다’고 하고 박·고 전 대법관은 ‘밑에서 오버했다’고 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알려진 사법농단 사례들만으로도 검찰 입장에서는 적당히 끝낼 수 없는 사안이다. 수사 대상만 대폭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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