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주도로 이뤄진 블랙리스트 업무를 말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을지언정 (범죄를) 공모할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의 김연학 재판장이 추명호 전 국가정보원 국익정보국장이 관여한 불법 사찰 혐의 등에 내린 결론이다. 추 전 국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이 저지른 불법 사찰과 정치 공작 등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1심은 이석수 전 청와대 특별감찰관을 사찰한 혐의 등은 인정해 추 전 국장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하며 법정 구속했지만, 직권남용 혐의 대부분에 대해서는 국정원 지휘부와의 공모관계를 문제 삼아 무죄로 판단했다.
유죄를 받아낸 검찰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반응이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4일 “1심 재판부는 비록 불법 사찰이라도 ‘국정원 공식라인’을 거쳤다면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국가정보원법은 ‘국내 보안 정보 수집’ 등으로 직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데도 ‘개인적 이익을 취할 목적이 없었다’ 등의 이유를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며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관계자는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법원행정처 소속 전·현직 판사들이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기소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1심 재판부는 ‘중간관리자’인 추 전 국장이 ‘부하 직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을 뿐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방식으로 이뤄진 일을 승인한 것뿐이다’ 등의 이유로 ‘윗선’과의 공모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도 무죄를 선고하며 “추 전 국장은 좌파 성향 단체를 파악해 그 명단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 소속 부서장이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블랙리스트 작성 상황 등을 소극적으로 보고받는데 그쳤을 뿐, 적극적으로 범행을 공모할 의사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에 대해서도 “이전부터 있었던 방식으로 정보가 수집됐고 이를 승인했다면, 직권남용에 대한 의식이나 의사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재판장인 김연학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2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행정처 ‘중간관리자’인 인사총괄심의관을 맡았다. 검찰은 그가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인 신분으로 여러 차례 검찰 조사도 받았다. 지난달 김 부장판사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민간인 사찰’ 혐의 1심 선고 때도 “지시에 따른 하급 공무원의 직무수행 행위가 위법하다는 이유만으로 상급 공무원의 지시가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며 직권남용죄는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검찰의 다른 관계자는 “사법농단 관련자 기소가 임박한 상황에서 법원이 직권남용 혐의와 관련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논리까지 개발하고 있다”며 그 배경에 의문을 나타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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