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취재진 질문에 아무 말 없이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백소아 기자
11일 전직 대법원장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 검찰에 소환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주요 혐의는 직권남용(형법 제123조)이다. 공무원(대법원장)이 자신의 직무권한을 남용해 다른 공무원(법관)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만들 때 적용된다.
검찰은 각종 재판 개입과 법관 사찰 및 블랙리스트 실행 등이 양 전 대법원장→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또는 일선 법원 재판부)→행정처 심의관으로 이어지는 지시·보고 구조 아래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그 정점에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은 ‘주범’이자 ‘공모’ 관계로 묶이게 된다.
지난해 11월 구속기소된 임 전 차장의 공소장을 보면, 양 전 대법원장이 임 전 차장과 무려 45차례 공모해 심의관 등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적시돼 있다. 앞서 법원은 “범죄 사실 중 상당 부분이 소명된다”며 임 전 차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임 전 차장에 대한 혐의 입증은 지시·공모 관계에 의해 상급자의 혐의 입증으로 이어진다.
사법농단 사건은 국정농단 사건과 닮았다. 국정농단 사건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청와대 비서관에 이르는 수직구조를 통해 이뤄졌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1심에서 주요 직권남용 혐의와 관련해 대거 유죄 판단을 받았다. 안 전 수석 등과의 공모 관계도 어렵지 않게 인정됐다. 국정농단 사건에선 안 전 수석과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 등이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됐다.
하지만 통상 ‘조직범죄’에서 중간 실무자에게 직권남용이 적용됐을 때 그 윗선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임 전 차장과 달리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법원은 “공모 관계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부 범죄 사실에서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이 약하다” 등의 이유를 들었다. 한 변호사는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 구속되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지시 과정을 밝히는 건 쉽다. 반면 먼저 구속된 중간 관리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윗선의 관여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임 전 차장의 범행이 그대로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가 되는 구조인데, 임 전 차장이 입을 열지 않으면 간접 증거를 통해 이를 밝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두 전직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임 전 차장이나 이규진 전 양형위원으로 곧장 연결되는 지시·보고 관계를 확인한 상태다. 양 전 대법원장 지시사항을 뜻하는 ‘大’(대)가 적힌 ‘이규진 업무수첩’이 안종범·김영한 업무수첩과 같은 파괴력을 지녔다는 평가가 검찰 내부에서 나온다.
현재 임 전 차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 태도가 곧 윗선의 지시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임 전 차장이 끝내 양 전 대법원장을 거론하지 않으면 일부 혐의는 공모 관계 입증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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