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기에 앞서, 자신이 근무했던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동안 이에 반대하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이 모든 것이 저의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으로 그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송구하다” “참담하다”고 운을 뗐다. “검찰이 수사를 한답니까”라고 되묻던 7개월 전 ‘놀이터 기자회견’ 때와는 사뭇 다른 시작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어진 발언은 대부분 책임 회피와 거리 두기였다. 최고 법관 출신답게 표현 하나하나에 ‘법적 안전장치’가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5분여에 걸친 ‘담벼락 성명’의 속뜻을 법조인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보았다.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는다. 그 사람들에게 과오가 있다고 밝혀지면 제 책임이고 안고 가겠다.” →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혹시 나 몰래 잘못을 저질렀을 수는 있는데, 그러면 사과는 하겠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자신의 혐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박하거나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사법농단에 연루된 다른 법관들을 언급하며, 그들에게 과오가 있다면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유체이탈식 화법’을 보여줬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결국 자신은 몰랐다는 것이다. 설사 도의적 책임이라도 법적인 책임은 없다는 말과 같다”고 분석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법적 책임은 회피하면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부 인정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의 태도보다 더 강경한 것이다. 한 판사는 “임(종헌) 전 차장 등은 적어도 ‘(재판 개입을 했더라도) 중립을 지키는 건 재판장의 일이다’라는 식이라도 말을 했다. 그런데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아예 문제가 없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기억나는 대로 답변하고 오해가 있으면 풀 수 있도록 설명하겠다. 편견,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소명되길 바란다.” → “기억나지 않거나 모르는 걸 답변할 수는 없다. 편견과 선입견에 의한 검찰 수사는 잘못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편견, 선입견, 선입관과 같은 단어를 다섯차례나 사용했다. ‘검찰 수사로 관련 자료와 증거가 나왔다’는 취재진의 말에 “누차 이야기했다. 그런 선입관을 갖지 마시라”고 했다. 지난해 ‘놀이터 기자회견’ 때 비슷한 질문을 받자 “질문이 이상하네”라며 강하게 부인한 것과 어조만 달라졌을 뿐 같은 취지다. 7개월여 진행된 검찰 수사를 ‘검찰의 오해’ ‘여론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치부한 것이다.
한 판사는 “편견과 선입견을 강조한 것은 결국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검찰 수사로 드러난 일들이 양 전 대법원장처럼 유신시대를 거친 법관들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문제 되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전 인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수사 과정에서 대법원을 들렀다 가고 싶었다.” → “나는 대법원장이었다. 내 뒤에는 수많은 판사가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정문과 담을 등지고 입장 발표를 강행한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판사→대법관→대법원장’을 거친 30여년 법관의 삶을 거론했다. ‘피의자 신분인데도 자신의 재판을 맡을 기관을 들러리로 내세워 검찰 수사를 압박하고 법원 내부 결집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이 전날부터 쏟아졌지만 ‘엘리트 법관’으로 탄탄대로만 밟아온 그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했다.
한 변호사는 “자신과 법원을 동일시한 것이다. ‘전직 대법원장에 대한 수사=법원 모두에 대한 수사’이기 때문에, 법원 내부 판사들을 향해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자신이 주요 보직에 임명했던 판사들이 여전히 법원 곳곳에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법원 조직을 사유화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비판적이던 일부 법관들도 대법원을 등에 업고 가려는 양 전 대법원장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고한솔 임재우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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