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뒤 나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 11일 전직 대법원장으로는 처음으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묻는 후배 법관 앞에 ‘피고인’으로 서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법조계 안팎의 관심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넘겨지기 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을지에 쏠린다.
1차 소환 조사에서 직간접 증거가 두루 드러난 주요 혐의에 대해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면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반면 퇴임한 지 불과 1년4개월밖에 되지 않은 ‘직전 대법원장’에 대해 과연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할 것인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앞서 법원은 ‘전직 대법관’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한 바 있다. 영장 발부를 자신한 검찰과 달리, 지난달 초 법원은 공모 관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11일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8시40분까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후 3시간 넘게 검찰이 작성한 조서를 꼼꼼하게 검토한 뒤 밤 11시55분 검찰청을 나섰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포토라인은 ‘패싱’했다. 이튿날인 12일 오후 2시 ‘예상’을 깨고 곧바로 검찰청에 다시 나와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전날 끝내지 못한 피의자 신문 조서 검토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조사 시간(11시간)보다 조서 검토(13시간)가 더 길었던 셈이다.
2차 조사부터는 비공개 소환하겠다고 밝힌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13일 “양 전 대법원장이 12일 오후에 다시 출석해 금요일(11일) 조사한 부분의 조서 열람을 마무리했다. 다른 조사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검찰은 1차 소환 조사 당일 일제 강제노역 재판 거래 혐의를 오후 늦게까지 집중적으로 캐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도록 한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실행 혐의를 조사했다고 한다. 두 혐의는 검찰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사의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무진이 한 일이라 모른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조서 열람에서는 검사의 질문이나 증거 제시에 대한 피의자 자신의 답변 내용이 제대로 적혔는지 살피고 고칠 부분은 수정한다. 조사 당일 또는 자정을 넘긴 이튿날 새벽에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검찰이 자정을 넘긴 심야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피의자가 이틀에 걸쳐 조서를 열람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최고 법관 출신으로 누구보다 법리에 밝은 양 전 대법원장이 답변 과정에서 혹시나 ‘법적 허점’을 드러낸 부분은 없는지 질문과 답변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살핀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의 이례적인 ‘1박2일 조서 열람’은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정해진 수순’으로 보고, 이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관련자로는 유일하게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상급자’로서 혐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검찰 수사 구도에는 사법농단 사건의 최종 책임자 자리에 양 전 대법원장이 놓여 있다.
“절반 가까이 조사를 마쳤다”는 검찰은 조만간 양 전 대법원장을 한두차례 더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내부에선 “공모 관계 성립이 의문”이라며 구속영장이 기각됐던 두 전직 대법관보다는 발부 가능성을 높게 본다. 양 전 대법원장이 핵심 실무자들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직간접 증거가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것도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명백한 물증에도 혐의를 부인했다면 ‘증거 인멸’ 우려가 생기기 때문에 영장 발부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전·현직 법관들을 확인한 뒤 당사자들을 압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대법원 ‘담벼락 성명’을 강행해 법원 안팎의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것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반면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영장 기각 때처럼 ‘방탄 법원’이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 변호사는 “직전 대법원장의 ‘담벼락 성명’ 자체가 자신을 지지하는 판사들에게 결집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대법원장이라는 지위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슈퍼 전관예우’가 작동할 경우 영장이 기각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임재우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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