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재진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법정으로 직행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검찰-전 대법원장 ‘창과 방패’ 싸움]
25년 후배 명재권 판사 심리로
‘직권남용’‘직접 지시’ 공방 예고
25년 후배 명재권 판사 심리로
‘직권남용’‘직접 지시’ 공방 예고
23일 오전 10시30분 사법농단 사태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운명을 가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사건에 연루된 100여명 전·현직 법관들과 달리,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는 ‘최고 법관’이다. 검찰 역시 이 부분을 집중 공략하며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필요성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이 사법연수원 25년 후배인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장판사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이르면 23일 밤, 늦어도 24일 새벽 사상 첫 전직 대법원장 구속 여부가 판가름 난다.
■“죄가 되지 않는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핵심 죄명은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다. 공무원이 본인의 직무 권한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할 때 적용된다. 반대로 대법원장의 직무 권한에 속하지 않는 일을 시켰다면 직권남용죄 성립이 어렵다. 국민의 법 감정이나 상식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지만, 최근 법원은 직권남용죄를 이런 식으로 좁혀 해석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역시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장이라도 일선 재판에 대해 지시하거나 개입할 권한은 없다’고 항변할 수 있다. 검찰 수사로 재판 개입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재판의 독립’을 여전히 ‘신봉’하는 고위 법관들의 의견도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상 사법행정의 최종 책임자로 ‘전권’을 가진다. 이를 아무리 좁게 해석해도 양 전 원장의 행위는 권한 밖 행위가 아니라 사법행정권을 휘두르던 중 그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밑에서 알아서 한 일”
검찰은 지난 7개월에 걸친 수사로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를 입증할 전·현직 판사들의 진술을 여럿 확보했다고 한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의 위법한 지시를 깨알처럼 받아 적을 때 대법원장을 뜻하는 ‘大’(대)라고 표기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현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업무수첩은 결정적 근거가 될 전망이다. 검찰은 ‘대법원장이 지시했다’는 이 전 상임위원의 진술도 영장심사에 제출할 계획이다.
그럼에도 양 전 원장은 “실무진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다. 최근 법원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관련 정보를 불법 수집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명시적으로 사찰 관련 정보보고를 승인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박병대 전 대법관은 자신의 아래인 임종헌 전 차장, 자신의 윗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미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양 전 대법원장은 불법적인 지시나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더이상 미룰 곳이 없는 대법원장이었다”며, 책임 떠넘기기 전략을 봉쇄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 “나는 모르는 일”
‘책임 떠넘기기’가 막힐 경우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아예 모르쇠 전략으로 나설 수도 있다. 검찰은 이에 대한 ‘맞춤형 증거’도 확보한 상태라며 구속영장 발부를 자신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전범기업 강제노역 사건 재판 지연을 논의하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본 기업 대리인을 직접 만나 논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당시 논의 내용이 담긴 문건을 확보해 뒀다. 또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사법정책에 반대하는 특정 법관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기 위해 직접 펜을 들어 ‘불이익 검토’에 브이(V) 표시를 한 문건도 검찰에 입수됐다. 검찰은 이런 문건 등이 양 전 대법원장이 불법 행위에 직접 가담한 생생한 물증이라며 영장전담판사를 설득할 방침이다. 이에 양 전 대법원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변호사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을 뿐이다” “브이 표시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방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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