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차에 오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이전과 이후는 다른 세상이다.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하며 ‘최종 심판자’를 자임해온 법원도,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비로소 확인하게 됐다. 불과 1년4개월 전 물러난 대법원장이 개인 비리도 아닌, 사법권 독립의 핵심인 재판과 법관 인사를 침해했다는 무거운 혐의로 구속된 점도 거듭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법조계에서는 “오늘의 구속은 끝이 아닌 사법개혁의 첫걸음이 돼야 한다”며, 이 점을 법원 전체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임 대법원장 구속 7시간 만인 24일 오전 9시께 출근하며 두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는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이어 “다만 저를 비롯한 사법부 구성원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겠다. 그것만이 우리가 어려움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고,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법원 구성원들은 대체로 차분하게 구속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의 인식을 경계했다. 한 판사는 “직전 대법원장의 구속 재판을 법원 스스로 인정할 정도라면 증거가 상당히 확보된 것 아니겠냐. 검찰 수사에 불만을 가진 법관들이 있지만, 일부 극소수여서 내부 갈등으로 번질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다른 판사는 “개인 일탈이 아닌 대법원장으로 행한 공적인 활동이 범죄가 됐다. 이전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로 남게 됐지만, 결국은 사법부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판사는 “대한민국 공직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됐다”고 의미를 부여하며 “양승태 대법원에 협력한 판사들에 대해서도 동정론이 아닌 재판 독립이라는 공적 가치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추가 징계나 국회의 탄핵 소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외부 정치권력에 대한 굴종과 저항의 사법사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왕적 대법원장’ 아래 사법 관료화라는 내부 싸움으로 대체됐다는 의미도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민변은 논평에서 “사법부 치욕의 날이 아닌 법원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날로 기억되길 바란다. 수십년 형성돼온 관료적 사법행정구조 폐해를 끊어내는 진정한 제도 개혁에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사법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며, 이를 촉발한 구조적 원인인 사법제도의 전향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3천명의 법관 인사를 결정하는 정점에 대법원장이 있다. 이런 인사 장악이 수십년 누적되면서 정치권 결탁과 재판 거래, 국민의 사법 불신으로 이어졌다”며 근본적인 개혁을 주문했다. 김 대법원장이 법관 인사 개혁 등 본인이 약속했던 ‘권한 내려놓기’에 대한 고민을 보여줄 때라는 주문이다.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 등을 논의 중인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의 어깨도 한층 무거워졌다.
김남일 고한솔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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