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왼쪽)가 11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기소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검찰이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 기소하고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을 불구속 기소했다.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직무와 관련된 범죄혐의로 법정에 서는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7개월간 이어져 온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는 양 전 대법원장 등 핵심 피의자가 재판에 넘겨지면서 사실상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고 밝혔다. 아울러 검찰은 이미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법관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추가기소했다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은 재임 당시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사법행정권을 불법적으로 남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에 적용된 혐의는 47개에 달하고, 공소장은 296쪽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혐의는 일제 전범기업 강제노역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을 ‘박근혜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지연시키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전범기업 쪽의 편의를 봐줬다는 ‘재판거래’ 의혹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범기업 쪽 대리인인 김앤장의 변호사를 만나 전합 회부 계획을 전달하고, 주심을 맡은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배상판결이 확정되면 국제법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직접 ‘실행자’로 활동한 정황이 드러났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빠져나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법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인사 개입’ 의혹도 핵심 혐의 중 하나다. 검찰 수사를 통해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 문건을 작성하고 문책성 인사조처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문건에 포함된 법관은 16명(중복 포함 31명)에 이르고, 이중 실제로 문책성 인사조처를 받은 사람은 8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문건에 자필로 브이(V) 표시를 하는 등 직접 결재하고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2016년 ‘정운호 게이트’ 수사 당시 검찰 수사 확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영장재판에 개입해 수사기밀을 수집한 정황도 혐의에 포함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등이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영장전담판사를 통해 법관 청탁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 관련자들의 법관 비위에 대한 진술 등 수사기밀 및 153쪽 분량의 수사보고서 사본을 입수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양 전 대법원장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재항고 개입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개입 △헌법재판소 내부정보 유출 △전국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비자금 조성 등 사법농단 의혹 대부분에 연루되어 있다.
이날 함께 기소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4년 2월부터 2017년 5월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연이어 지내며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개입’·‘인사개입’ 등에 공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의 경우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형사사건 청탁을 받고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을 무단으로 열람한 혐의(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도 받고 있다.
앞서 이미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검찰은 임 전 차장에 대해 지난 두 번의 기소에 포함되지 않은 ‘법관 블랙리스트’ 혐의를 이번에 추가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달 중 차한성 전 대법관,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 다른 주요 혐의자에 대한 기소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검찰 관계자는 “오늘 기소 이후에 이 사건에 관련된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기소 여부와 비위사실 통보 여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면서 “가급적 2월 내에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