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보석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검찰은 목표의식에 불타는 영민한 검사 수십명을 동원해 우리 법원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300여페이지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이제 이 공소장이 무에서 무일 뿐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처음 선 양승태(71·구속기소)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무결점’을 항변하며 검찰의 수사를 날 선 어조로 비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보석 심문에서 ‘사법연수원 24년 후배’인 형사35부 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에게 자신이 보석으로 풀려나야 하는 이유를 13분간 풀어나갔다. 후배 재판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우리 법원” “우리 법관”이라는 표현도 여러차례 썼다.
지난달 24일 구속된 양 전 대법원장은 33일 만인 이날 수의가 아닌 양복과 셔츠 차림으로 법정에 나왔다.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이 끝난 뒤 발언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은 ‘구치소 경험담’부터 꺼냈다. “며칠 전 구치소 수감자가 내 방 앞을 지나가면서 ‘대한민국 검찰이 참 대단하다. 우리는 법원을 하늘같이 생각하는데 검찰은 법원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전 대법원장을 구속까지 시켰으니 정말 대단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어 검찰 수사가 법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고 사법농단 수사 역시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조사받는 과정에서 검찰이 법원 재판에 대해 이해를 못 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대법원의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 이해가 없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이런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 서야 한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호미 자루 하나도 없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반면 검찰은 이날 심문에서 양 전 대법원장의 증거인멸 시도를 거론하며 구속재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에 대해 디가우싱(영구 삭제)을 지시했고, 차량 압수수색 과정에서 변호인을 통해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폐기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윗분들이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겠나. 내가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풀려나면 사건에 연루된 전·현직 법관의 진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의 포렌식 절차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고 반박했다.
박 부장판사는 “적절한 시기에 (보석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1시간10분여 만에 심문을 마쳤다. 보석 결정에는 보통 2~3일, 길게는 2주일 정도 걸린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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