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 이민걸(58)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 전·현직 고위법관 10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다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공범’으로 이름을 올렸던 권순일(60) 대법관과 차한성(65) 전 대법관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됐다.
5일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는 이 전 실장을 비롯해 이규진(57) 전 양형실장, 신광렬(54)임성근(55)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등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유해용(53)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이태종(59) 전 서울서부지법원장, 심상철(62) 전 서울고등법원장, 성창호(47)·조의연(53)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와 방창현(46)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도 재판에 넘겨졌다. 이에 따라 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을 받는 전·현직 판사는 앞서 기소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62)·고영한(64) 전 대법관,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비롯해 14명으로 늘었다.
이와 함께 이날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확인된 현직 법관 66명에 대한 비위 사실을 증거자료와 함께 대법원에 비위통보했다.
검찰 관계자는 “단순히 죄가 된다고 기소범위를 정하면 기소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질 수 있어 기소를 한정했다”며 “범죄혐의 중대성, 가담 정도, 실제 수행한 역할, 지시에 따른 수동적 이행인지 적극적 가담인지 여부, 그 행위에 대한 불법성을 명확히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진상규명에 대해서 기여한 정도, 현행법상 범죄 구성 여부 등 현실적인 공소유지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실장은 2016년 3월 서울고법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장을 직접 만나 재판장에게 “1심 법원의 소 각하 판결을 비판하고 본안 판단을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법원행정처 입장이 기재된 문건을 전달하여 담당 재판장에게 검토하게 함으로써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고, 법과 양심에 따른 법관의 독립된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같은 시기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입장을 지속해서 표명한다는 이유로 법관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의 활동을 저지하고 종국적으로 와해시키는 방안을 강구했다고 한다. 또 같은 해 10∼11월 당시 국민의당 박선숙·김수민 의원으로부터 재판부 심증을 알아봐 달라는 청탁을 받아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을 통해 재판부 심증을 파악해 전달해준 것으로 조사됐다.
이규진 전 양형실장(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헌법재판소 내부기밀을 불법수집하고, 옛 통진당 관련 재판 개입, 법관사찰 등 혐의를 받는다.
임 전 수석부장판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 체포치상 혐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신 전 수석부장판사는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당시 판사들 상대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영장전담 재판부를 통해 검찰 수사상황을 빼내고 영장심사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낸 혐의를 받는다.
이와관련해 지난달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한 성 부장판사 등 당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법관 2명은 수사기밀을 보고한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성 부장판사는 신 전 수석부장판사로부터 수사가 예상되는 법관 가족 31명의 명단을 제공받아 영장심사에 활용했다고 한다.
이 전 서부지법원장은 서울서부지법 집행관들 비리 사건과 관련해 다른 법원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에 수사기밀을 보고한 혐의, 심 전 서울고법원장은 법원행정처 요청에 따라 옛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 항소심이 특정 재판부에 가도록 ‘배당조작’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5일 오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그가 기소되면 재판은 누가 맡을까.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유 전 수석재판연구관은 청와대 요청을 받고 박 전 대통령 ‘비선 의료진’ 김영재 원장의 특허소송 관련 자료를 청와대 쪽으로 누설한 혐의, 지난해 초 법원을 퇴직하면서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내부기밀을 무단으로 들고 나간 혐의 등이 적용됐다. 방 부장판사에게는 법원행정처의 요구를 받고 자신이 담당하던 옛 통진당 의원들 사건의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를 누설한 혐의가 적용됐다.
이번 기소 대상에선 권 대법관 등 대법관급은 제외됐다. 권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일하면서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 작성에 가담한 혐의, 차 전 대법관은 법원행정처장 시절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민사소송 ‘재판거래’에 관여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 관계자는 “권 대법관과 차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에 있었던 2012∼14년엔 강제징용 재판 지연이 비교적 노골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판사 블랙리스트 건 역시 불이익이 실현되기 전이었던 점을 고려했다”면서도 “다만, 현재 윗선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판과정에서 어떤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두 사람을 기소하게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양진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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