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원세훈 문건’, ‘전교조 소송’등 재판거래 문건을 생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다주 울산지법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신분으로 조사받기 위해 출석하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백소아 기자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 실무 총책임자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그의 ‘손발’ 구실을 했던 현직 판사가 증인으로 처음 나왔다.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 전 차장 재판에는 정다주(43·사법연수원 31기) 의정부지법 부장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임 전 차장 재판에 선 첫 번째 증인이다. 정 부장판사는 2013년부터 2년여 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대선개입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소송’ 등과 관련한 재판 거래 문건을 여럿 작성한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정 부장판사는 이날 임 전 차장 지시로 일부 문건을 작성했다고 인정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퇴행적·보수적 판결들을 묶은 문건에 ‘과거 왜곡의 광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대표적이었다. 이 문건은 해당 판결들을 통해 사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했다’고 밝혀 재판 거래 수사의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정부나 여당에서 긍정적으로 볼 만한 판결을 뽑아달라고 해서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정 부장판사는 또 “임 전 차장으로부터 ‘청와대가 전교조 사건을 최대 현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만약 재항고를 기각하면 역풍이 불 수 있다. 사법부에 대한 보복이 이뤄질 수 있다’는 배경 설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래서 (임 전 차장이) 재항고를 인용하는 것으로 저에게 결론을 구술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검찰이 “재항고 사건을 인용하는 방향으로 검토할 것을 임 전 차장이 지시했냐”는 물음에 “결국 그런 지시를 했던 것”이라고 답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언도 잇따라 나왔다.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행정처 전체 부서가 투입되는 등 행정력이 동원됐나”라는 검찰측 질문에 정 부장판사는 “그렇다”고 답했다. 중요사건 판결이 선고된 경우,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이 법원측 보도자료를 요청하면 정 부장판사는 공보관을 통해 입수한 보도자료를 건네줬고 법원 전산망에서 관련 판결문을 다운받아 이메일로 보내주기도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원세훈 문건’, ‘전교조 소송’ 등 재판거래 문건을 생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다주 울산지법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신분으로 조사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재판 과정에서 정 부장판사가 임 전 차장의 지시를 자필로 기록한 업무일지 일부가 법정에서 공개됐다. 정 부장판사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2013~2015년 법원행정처 근무 당시 작성한 업무일지 세 권을 검찰에 제출했다. 사법농단 문건 작성 업무에 관련해 정 부장판사는 “당시 사법부의 권한을 남용하는 내용이 많아 비밀스럽게 문건을 작성해야 했다. 부담이 됐다”, “내용이 민감해 임 전 차장에게만 보고하고 다른 심의관과는 공유하지 못했다”는 검찰 조사에서의 진술을 재확인했다.
이날 정 부장판사는 재판부에 증인 지원 및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방청석에서 대기하다 증인신문이 시작되면 증인석에 앉는 일반 증인들과 달리,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드나드는 통로를 통해 법정에 들어섰다. 정 부장판사는 자신의 진술이 적힌 검찰 조서 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법조인 필수품’인 골무를 검사로부터 빌려 손가락에 낀 뒤 빠른 속도로 문건을 넘겨 보기도 했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임 전 차장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고 주장했던 임 전 차장측 유에스비(USB·이동식저장장치)를 증거로 채택했다. 재판부는 “압수수색 영장에 기재된 범죄사실과 이 사건 공소사실의 객관적인 관련성이 인정된다. 원본의 반출이 인정되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해당 유에스비에는 임종헌 전 차장 행정처 근무 당시 생산된 내부문건 8천여건이 담겨 있다. 임 전 차장은 검찰이 적법 절차를 어겨 유에스비를 확보했다고 주장해왔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