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금요일 밤 김학의 전 차관으로 보이는 남성(왼쪽)이 출국하려다 제지당한 뒤 선글라스와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JTBC 화면 갈무리.
3월 마지막 주,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한창일 때였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관계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점심때 선약 없으면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마주 앉은 그는 ‘김학의 동영상’ 얘기를 꺼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씨의 원주별장에서 여성들과 관계 맺는 장면이 찍혀 있다는, 그래서 2013년 이래 잊을 만하면 거론되고 또 거론되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한 지시로 검사만 13명이나 투입-검찰 역사에 남을 2003년 대선자금 사건 때도 수사 초기 검사 수는 이보다 작았다-된 검찰의 특별한 수사까지 이뤄지게 한 그 동영상 말이다.
“아무래도 박영선 의원이나 박지원 의원이 착각한 것 같아요. 그 당시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을 보면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김학의 (원주별장) 동영상’을 처음 입수한 것은 2013년 3월19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권아무개씨를 조사하면서인데, 두 박 의원은 3월13일에 동영상을 제보받았다고 했잖아요. 그 전엔 경찰이 ‘김학의 동영상’을 확보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어요. (그러니 동영상을 제보받았다는) 날짜가 그렇게 (엿새 앞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동영상과 함께 ‘3월13일’과 ‘황교안’이라는 이름을 거론했다. “2013년 법제사법위원장 재직 시절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임명 과정에서 검증이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다.
● “제보받은 동영상 시디(CD)를 꺼내서 황교안 (당시) 법무장관님께 ‘이것은
제가 동영상을 봤는데 몹시 심각하기 때문에 이 분이 차관으로 임명되면 이건 문제가 굉장히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 (영상을 봤을 때 김학의 차관이 좀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하던가요?) (가능)했습니다. 그 영상을 저만 본 게 아니고요. 박지원 대표님도 보셨습니다.”
박영선 후보자는 자신의 업무 수첩을 근거로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을 면담한 시점이 “(2013년) 3월13일 오후 4시40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13일이라는 날짜는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하다. 2013년 3월13일 박근혜 정부는 법무부 차관에 김학의 대전고검장을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날 오후 경찰청 수사국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처음으로 ‘김학의 동영상 내사’ 사실을 보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황 장관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엄중 경고했다는 것이 박 후보자의 주장이다.
자칭타칭 ‘박 남매’로 불리는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도 곧바로 박 후보자에 대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는 28일 <교통방송>에 출연해 “제가 2013년 3월 초에 경찰 고위 간부로부터 시디(CD) 동영상, 녹음테이프, 사진을 입수했다”며 “(그 경찰 간부가) ‘검찰이 (수사를) 잘 안 해준다. 그러니까 적당한 때 법사위에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료를 줬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박영선 후보자가 당시) 저한테 전화로 낄낄거리면서 '황교안 장관한테 얘기했더니 얼굴이 빨개지더라'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말을 정리하면, 박지원 의원이 3월 초 문제의 ‘김학의 동영상’ 시디 등을 경찰 고위 간부한테서 받았고, 이를 넘겨받은 박영선 후보자가 3월13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직접 만나 동영상의 심각성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용주 의원까지 “(그 동영상을) 2013년 1월 정도에 본 적이 있다”고 가세하며 힘을 실었다.
이들의 주장은 가뜩이나 ‘화약고’인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4·3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쟁의 핵심 쟁점 중 하나로 이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제1야당의 얼굴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박 후보자의 ‘시의적절한 경고’를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김 전 차관을 비호한 사람이 됐다. 반대로 인사청문회에서 여러 문제로 시달리던 박 후보자는 왕년에 법사위원장 구실 제대로 한 사람처럼 비쳤다.
그런데 이 모든 얘기가 적어도 수사기록과는 배치된다고, 거기에 나오는 사실과 어긋난다고, 과거사위 관계자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검경의 수사기록 전체를 읽어봤다고 했다.
“수사기록을 근거로 얘기하는 겁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처음으로 ‘김학의 동영상’과 관련해 내사에 착수한 것은 3월18일 동영상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최아무개씨를 참고인으로 조사하면서입니다. 그 날짜 최 씨의 조서에 ‘김학의’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찾아봐도, 기록에 전혀 나타나질 않아요. 경찰은 최씨의 진술을 확보한 다음 날, 그러니까 3월19일에 권아무개씨를 불러 조사합니다. 권씨는 김 전 차관을 접대했다는 건설업자 윤중천 씨와 한때 내연 관계에 있던 여성인데, 이날 문제의 동영상이 담겨 있는 휴대전화를 처음으로 경찰에 제출했다고 나옵니다.”
김 전 차관이 임명되고 나흘 뒤인 3월19일, 휴대전화 속 동영상을 확보한 경찰은 경찰청 과학수사대에 감식을 맡기는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도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20일, 이 사건을 내사에서 수사로 전환했다.
권씨가 제출한 휴대전화에는 1분3초짜리 동영상 1개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동영상은 애초 박아무개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 중 일부다. 박씨는 문제의 동영상들이 촬영된 2007~2008년께 건설업자 윤중천씨, 피해자라는 권씨 등과 가깝게 어울렸다. 그러다 2012년 12월 권씨와 윤씨의 관계가 틀어져 ‘고소전’으로 치달을 무렵 박씨는 권씨에게서 “윤씨가 가져 간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차량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성접대 동영상이 든 시디를 여러 장 발견했다. 이 시디는 2008년 5월께 건설업자 윤씨가 동영상이 든 자신의 휴대전화를 조카에게 건네며 “시디로 구워달라”고 해서 받아놓은 것으로, 윤씨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시디를 따로 챙긴 박씨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재생하며 휴대전화로 재촬영한 뒤 원본 시디를 버렸다(고 나중에 경찰에 진술했다).
경찰이 3월19일 권씨에게서 제출받은 동영상은 박씨가 권씨에게 휴대전화로 전송한 것이다. 박씨가 재촬영한 것이라 화질이 좋을 리 없었다. 감식과 감정 결과도 경찰의 기대에 못 미쳤다. 경찰청 과학수사대는 ‘식별 불가’라고 회신했고, 국과수는 “윤곽이 흐릿하지만, 김학의임을 배제할 수 없다”는 애매한 감정 결과를 통보해왔다. 이게 3월25일의 일이다.
그럼 경찰이 ‘깨끗한 동영상’, 즉 화면 속 남성이 김학의 전 차관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아볼 수 있는 동영상을 확보한 것은 언제일까. “수사기록에는 5월2일이라고 나온다.” (과거사위 관계자) 동영상을 보관하고 있던 박씨가 경찰청 특수과 조사를 받을 때 임의제출을 하면서다. 박씨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시디 속 동영상을 재생하며 휴대전화로 촬영한 뒤 ‘원본’ 시디를 버렸으나, 재생 과정에서 동영상이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자동 저장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다시 정리해 보면, 경찰이 최초로 ‘흐릿한’ 김학의 동영상을 제출받은 시점은 2013년 3월19일이고, ‘깨끗한’ 동영상을 확보한 것은 그보다 두 달 뒤인 5월이다. 그런데 ‘박 남매’는 이보다 훨씬 이른 3월 초에 김학의 동영상을 제보받았고, 3월13일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게 이를 알렸다고 한다. 경찰이 동영상을 확보하기 엿새 또는 그 이전이다. 더욱이 박영선 후보자는 “제가 동영상을 봤는데, (김 전 차관이)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말했다. 3월13일은 경찰이 흐릿한 동영상조차 확보하기 이전 시점이다.
박지원 의원은 동영상 제보자를 ‘경찰 고위 간부’라고 콕 찍어 밝혔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경찰 고위 간부는 경찰청 특수수사과도 구하지 못한 동영상을 무려 2주가량 앞서 확보했다는 소리가 된다. 어찌된 영문일까.
일부에선 2012년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 과정에서 동영상이 확보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경찰 내부, 특히 경찰대 출신 상층부가 검찰에 치명적인 이 동영상을 ‘검경 수사권 조정’에 유리한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소문을 흘리고, 박지원 의원에게도 제보했다는 추론 또는 음모론과 닿아 있다.
서초서는 2012년 10월 윤씨 부인한테서 간통 혐의로 피소당한 권씨가 한 달 뒤 윤씨를 성폭행 등 혐의로 고소하자 수사에 나섰다. 그해 12월26일 권씨와 가까운 최씨가 참고인 조사를 받으며 ‘김학의’와 ‘원주별장 성접대’ 얘기를 꺼내자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원주별장의 CCTV 화면을 확보했다. 드나든 차량과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원본 씨디 소지자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동영상 확보도 물 건너 갔다. 이 때문에 경찰도 원주별장 성접대 의혹을 정식 수사로 전환하지 못한 채 내사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 2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민갑룡 경찰청장도 3월19일 이전에 “(김학의) 동영상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 박지원 의원에게 제보했다는 ‘경찰 고위 간부’가 경찰 수사팀을 통해 그 동영상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이쯤에서 ‘소거’되는 셈이다.
경찰이 2013년 3월19일 이전에 김 전 차관을 식별할 수 있는 화질의 동영상을 확보하지 못한 사정은 권씨 휴대전화를 제출받은 뒤에 취한 조처에서도 드러난다.
“경찰이 3월19일 이전에 김 전 차관을 식별할 수 있는 동영상을 이미 확보해서 가지고 있었다면 경찰청 과수대, 국과수에 정밀 감식과 감정을 의뢰하느라 부산을 떨 이유가 없지 않겠나. 일찌감치 청와대나 민정수석실에도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김학의 리스크’를 보고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검경 수사권 조정은 나중에 만들어낸 말일 테고, 경찰 입장에서 김 전 차관 건은 정권 초기에 확실히 ‘한 건’할 수 있는 기회였다. (확실한 동영상이 없는 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김학의 동영상’ 얘기가 돈 것은 서초서 조사 내용이 외부로 일부 흘러나간 결과로 보인다. 경찰이 3월 초에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것도, 사건 전개 과정을 보면, 동영상 없이 말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 관계자)
다만, 박지원 의원에게 동영상을 건넸다는 그 ‘경찰 고위 간부’가 경찰 내부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동영상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은 2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동영상을 보관하고 있던) 박씨가 경찰에 제출하기까지 6개월 간 이 시디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고 밝혔다. 박씨를 시발점으로 이 동영상이 어떤 식으로든 유통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민갑룡 경찰청장은 당시 경찰 고위 간부한테서 동영상을 받았다는 박지원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적어도 경찰 ‘수사라인’은 3월19일 이전에 문제의 동영상을 갖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유출됐을 리 없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동영상의 최초 확보 시점은, 검찰 수사에서도 비중이 크다. ‘김학의 동영상’이 3월19일에야 경찰에 확보됐다는 사실은 수사 외압, 즉 당시 청와대와 민정라인의 직권남용 혐의를 가리는 데 매우 중요하다. 앞서 경찰의 다양한 ‘관계자’가 여러 언론에 “3월13일 김 전 차관 내정 이전에 동영상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했고, 이로 인해 질책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경찰이 문제의 동영상을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피해자 최씨 등의 진술만 확보한 상태였는지는 그 첩보보고의 신뢰도를 가리는 관건이 될 수 있다.
이는 김 전 차관 임명과 사퇴의 수수께끼와도 직결된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경찰의 보고 누락 탓에 ‘동영상’ 문제를 미리 거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경찰 쪽은 여러 경로를 통해 간곡하게 ‘만류성’ 보고를 했음에도 무시됐다고 맞서고 있다. 그런데 김 전 차관 임명 나흘 뒤인 19일 동영상이 경찰 손에 들어가자 이틀 뒤인 21일 김 전 차관은 갑자기 사퇴했다. 19일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경찰이 처음으로 의미 있는 동영상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박지원 의원이 제보받고, 박영선 후보자가 김학의 전 차관을 육안으로 식별한 뒤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게 경고했다는 그 동영상의 ‘출처’다. 열쇠는 이 동영상의 원본을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었던 ‘사업가 박씨’가 쥐고 있다. 통제할 수 없었다는 그 6개월 동안 동영상을 누구에게 얼마나 퍼뜨렸는지, 혹은 전혀 유통한 사실이 없는지는 검찰이 수사를 통해 밝힐 일이다.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도 “(박지원 의원에게 동영상을 건넨) 경찰 고위 간부가 누구인지는 (검찰) 수사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희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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