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 사진부터)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이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첫 공판에 각각 참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때 사법부 서열 1·2위였던 양승태(71)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62)·고영한(64)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법대가 아닌 피고인석에 나란히 섰다. 29일 정식재판 첫날을 맞아 이들은 “엄청난 반역죄를 행한 듯한 검찰 공소사실은 소설” “재판 거래, 사법농단이라는 말잔치”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수사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전직 사법부 수뇌부의 재판 독립 침해 등을 판단해야 하는 재판부가 앞으로 소송지휘를 어떻게 할지 관심이 쏠린다.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심리로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10여개 죄명, 47개 범죄 사실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의 첫 공판이 열렸다. 박·고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과 공범으로 법정에 함께 섰다. 재판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열렸던 417호 형사대법정에서 진행됐다. 두 전직 대법관은 재판이 시작되기 20분 전 미리 법정에 도착해 굳은 표정으로 짧은 악수를 나눴다. 구속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이 시작된 뒤 정장 차림에 수인번호가 적힌 흰색 표찰을 달고 법정에 들어섰다. 지난 1월24일 구속되고 125일 만에 열린 첫 정식재판이다.
1시간가량 이어진 검찰의 범죄 혐의 설명이 끝난 뒤, 이들은 오전과 오후 내내 긴 시간 동안 강한 어조로 검찰 수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80명이 넘는 검사가 8개월이 넘는 수사 끝에 300페이지가 넘는 공소장을 창작했다. 법관생활 42년 동안 이런 공소장은 처음 봤다”며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 한편의 소설을 쓴 것이다. 모든 것을 부인하겠다. 공소 자체가 부적법하다”고 강변했다. 그는 검찰 수사가 자신을 반드시 처벌하려는 목적의 “사찰”이라는 주장도 폈다.
박 전 대법관도 “재판 거래니, 사법농단이니 말잔치만 무성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속수무책으로 떠밀려왔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낸 뒤, 검찰의 공소사실을 “견강부회” “과대포장”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보다 혐의가 덜한 고 전 대법관은 검찰이 적용한 직권남용죄를 적극적으로 다퉈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검찰은 제가 극도로 노심초사하면서 직무를 수행한 것이 모두 직권남용이라고 한다. 나중에 보면 다소 부적절한 게 있더라도 이를 곧바로 형사범죄라 할 수 없다. 유례없는 재판에서 직권남용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장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쪽 변호인은 검찰 발언 도중 “일부 내용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검찰에 주의를 줬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소설의 픽션” “검찰공화국” 등 발언에 반박하려 했지만, 재판부는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날 방청석에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꾸린 ‘두눈 부릅 사법농단 재판 시민방청단’ 30여명이 자리해 양쪽의 공방을 지켜봤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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