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 사진부터)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이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법원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첫 공판에 각각 참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만약 살인사건이라고 해봅시다. 칼을 증거로 제시한다 했을 때 검사가 ‘피고인이 피해자를 찌른 칼’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쪽 변호인)”
“그럼 그냥 ‘이건 칼입니다’라고 합니까? 증거의 입증 취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검사)”
31일 ‘사법농단’ 연루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두 번째 재판 도중 난데없이 ‘살인사건’, ‘칼’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검찰이 과거 ‘법원에서’ 사전 유출됐다는 영장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그 출처를 설명하자, 피고인 쪽이 “검찰이 이걸 어디서 발견했는지, 이 문서 자체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며 발언을 제지하는 과정에서다. 서류증거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은 설명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양 전 대법원장 쪽은 ‘살인사건’ 비유를 들어 적법한 증거 조사 방식을 설명하려 했다. 검찰은 결국 “피의자가 피해자를 찌른 칼이라고 말도 못 하면, 서증조사는 왜 하느냐”고 되물었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이의 신청을 받아들여 검사 쪽 서류증거 조사 방식에 제한을 뒀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검찰과 세 피고인은 서류증거 조사 방식을 두고 온종일 검찰과 날 선 공방을 벌였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처장 등은 검찰의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거나, 검찰이 재판에 증거를 제시하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법농단 의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탄희 전 판사(현 변호사)의 사직서를 증거로 제시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검찰이 이 전 판사의 사직서를 실물화상기에 띄우면서 “이 사직서를 통해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이탄희 판사가 발령을 받게 되자…”라고 운을 떼자마자, 양 전 대법원장 쪽 변호인은 사직서에 나와 있는 내용 외에 부가 설명을 덧붙여선 안 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했다. 검사는 “이탄희 판사의 사직 이유가 증거를 통해 입증하려는 취지에 해당한다”고 맞섰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검찰은 재판 말미에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검찰은 “재판부 결정은 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공판중심주의에도 어긋난다. 법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받아들여 검사의 적법한 설명까지 제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 등을 종합해보면, 특정 증거가 해당 사건의 쟁점과 어떻게 연관됐는지, 해당 증거로 무엇을 입증하려 하는 건지 증거조사 과정에서 진술 가능하다는 게 검찰 쪽 설명이다. 검찰은 “사직서도 마찬가지다. 해당 서류 증거에는 일신상 사유로 사직한다는 의사표시만 기재돼있다”며 “그 자체로는 쟁점과의 관련성과 입증 취지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직서와 공소사실과의 관련성, 입증 취지를 설명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찰 쪽 이의 신청도 기각했다. 재판부는 “검찰 설명은 쟁점과의 관련성이나 입증 취지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진술을 제한한 것이다. 검사의 이의 신청은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변호인과 검찰이 내내 설전을 벌인 탓에 이날 예정된 증거의 절반가량만 조사하고 재판은 마무리됐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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