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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내키지 않는” 부당지시, 행정처 심의관은 왜 알고도 따랐나

등록 2020-07-04 19:21수정 2020-08-20 01:36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21. 복종 의무의 한계선

헌재 견제용 기사 작성 지시 등
법원행정처장 압박 못 견뎌 했다
행정처 심의관들 증인 출석해 증언
“상급자 지시 복종할 의무가 있어서”

임종헌 전 차장의 무죄 주장 논리이기도
명백한 위법 아니면 복종해야 한다?
검찰은 성실 의무 우선이라고 맞서
‘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6월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그는 재판에서 “행정법에 공무원은 행정조직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6월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그는 재판에서 “행정법에 공무원은 행정조직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대법원을 겨냥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거침없는 발언에 법조계가 술렁이고 있다.”

2016년 3월25일 <법률신문>은 이렇게 시작되는 기사를 보도했다.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대법원장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에 대해 “솔직히 자존심 상한다”고 하자, 법원 내부에 불편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였다. 여러 건의 익명 인터뷰가 그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민생경제가 어려운 시점인데도 헌재는 개헌을 통한 권한 확대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발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헌법기관 간의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서초동의 한 변호사) 기사는 대법원장 권한을 경시한 헌법재판소장 발언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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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으로 헌재 압박한 법원행정처

이 기사가 ‘대필’된 것으로 밝혀진 건 2년여가 흐른 뒤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박한철 소장의 토론회 발언을 보고 격분해 대응책을 마련했다. 박 소장 발언을 분석한 ‘헌재 소장 발언의 문제점 분석 보고’ 문건을 만들고 헌재 소장에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 업무를 당시 문성호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에게 맡겼다. “문 판사님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기사 초안을 작성해보세요.”

“기사의 초안까지 작성해주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습니다. (중략)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 제공 정도로 무마하고 싶었는데 (임종헌 전 차장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 강압적으로 지시하셔서 거역하지 못하고 알겠다고 하고 방(차장 집무실)에서 나왔습니다.”

지난 6월15일 문성호 전 심의관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농단 의혹’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이같이 회고했다. 적절한 지시인지 의문이었고, 내키지 않아 거절도 한 번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지시에 따라야 했다는 취지다. 문 심의관은 결국 기사 초안을 작성해 <법률신문>에 건넸다. 그가 작성한 기사는 일부만 수정된 채 제목, 내용, 인터뷰 내용 그대로 기자의 이름을 달고 보도됐다.

임종헌 전 차장을 비롯한 법원행정처 수뇌부의 ‘사법농단 의혹’ 재판에는 이들의 지시를 받은 전직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증인으로 줄줄이 출석 중이다. 수뇌부의 업무지시가 정당했다는 이들도 있지만, 그 지시를 받아들고 잠시나마 머뭇거린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 또한 그 머뭇거림을 이기고 지시를 실행에 옮겼다. 무엇이 주저하는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문성호 전 심의관은 2015년 2월부터 2년 동안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으로 일했다. 최고 사법기관의 지위를 두고 대법원과 경쟁관계에 있던 헌법재판소를 감시·견제하는 실무를 맡았다. ‘헌재에 민감한 현안이 계류돼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이슈와 관련해 헌재가 법원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비상적 대처 방안으로 노골적 비하 전략을 세워 헌재 위상을 하락시키고 헌재 결정의 권위도 떨어뜨려야 한다.’ 2015년 10월 문 전 심의관이 작성한 보고서 내용이다. 헌재 소장에 대한 부정적 소문을 활용하는 방안까지 담겼다. 지난 6월 임 전 차장 재판에서 검사가 물었다.

“헌법재판소에 대한 노골적 비하 전략을 검토하는 등 비상적, 극단적 대처방안을 마련한 이유가 무엇인가요.”(검사)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불러준 대로 적은 메모를 문서화했습니다. 상급자의 지시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게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란 직책이자, (그 직책의) 성질이기 때문에 그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문성호 전 심의관)

“그렇다 하더라도, 증인이 봤을 때, 이 내용 자체가 비상적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내용만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거절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못한 게 후회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재판 등 사법농단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수차례 출석했는데, 그는 부당한 지시에 따랐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마음에 부담이 있었다”, “내키지 않았다”,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복종 의무’를 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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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의 무죄 주장 논리로도 쓰여

법관은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배치돼 ‘심의관’으로서 사법행정 업무를 맡기도 한다. 재판을 하지 않는 대신, 법원행정처장, 차장 등을 보좌해 사법 지원 정책을 기획하거나 인사 실무를 한다. 그때 심의관은 여느 공무원처럼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복종 의무(국가공무원법 57조)를 진다. 조직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심의관은 실장, 처·차장 등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법원행정처 간부의 지시가 꺼림칙하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런 복종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문성호 전 심의관 주장이다.

문 전 심의관처럼 ‘지시가 부적절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전직 심의관의 법정 증언은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예의에도 어긋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했다.”(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관련해 재판개입 검토 문건을 작성·전달한 박찬익 전 사법정책실 심의관) “법률적인 의견이어서 부적절했다고 생각했다.”(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한 대한변협 압박 방안 문건을 작성한 김민수 전 기획조정실 심의관)

솔직한 고백일까, 뒤늦은 변명일까.

법관은 일반 공무원과 다르게 헌법에 의해 그 신분을 두텁게 보장받는다. 재판 업무를 하든, 행정 업무를 하든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공무원이 위법·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 내용과 강도에 따라 파면·해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법관은 다르다. 징계를 받긴 하지만, 법관 징계법상 가장 높은 수위의 징계는 정직 1년이다. 법관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면 탄핵하는 수밖에 없다. 문 전 심의관은 2018년 12월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견책)를 받았다. 솜방망이 징계라는 비판이 법원 안팎에서 제기됐지만, 문 전 심의관은 그마저도 불복해 행정소송을 낸 상태다. 부적절한 업무 수행을, 위계 조직에서의 복종 의무 논리로 합리화하려는 것 아닌지 의구심도 드는 이유다.

전직 심의관에게 주어진 복종 의무는 임종헌 전 차장의 무죄 주장 논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 전 차장 재판에서 꾸준히 논의돼온 쟁점이다.

임 전 차장에게 적용된 혐의인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한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상급자 지시에 따른 건 의무 없는 일이 아니라 의무 있는 일이고, 그래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임 전 차장 주장이다.

물론 상급자의 모든 지시를 다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위법한 지시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위법성이 명백해야 한다. 각종 사법행정 현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의관으로 하여금 현안을 검토하고 보고서나 기사 초안 등을 작성하게 한 것은 정당한 사법행정의 영역이라는 것이 임 차장의 논리다. 명백히 위법이 아닌 이상 그 지시는 따라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복종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공직사회의 업무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 그는 행정법 교과서까지 언급하며 이를 강조했다.

“검사님께서 ‘복종 의무’와 관련해 저희가 독단적인 법리를 창출했다고 하시는데, 행정법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공무원은 행정조직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직무상 명령이 명백하게 위법한 경우에만 복종 의무가 없다고 행정법 교과서에 써 있으니까 자세히 봐주세요.”(2019년 3월19일 임종헌 전 차장 재판)

검찰은 지시도 지시 나름이라고 맞선다.

국가공무원법상 상급자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57조)보다, 모든 공무원은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성실 의무(56조)가 우선이라는 게 검찰 주장이다. 조직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복종 의무보다 국민이 위임한 권리로 만들어진 법령을 준수하는 게 더 중요하다. 법관 독립, 재판 독립을 지원하고 보호해야 할 사법행정의 한계를 넘어 심의관 고유의 권한과 역할, 주어진 원칙, 기준, 절차를 어겼다면, 그 정도가 중대하든 중대하지 않든 심의관은 이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임 전 차장은 직권남용죄 구성 요건을 법적 근거 없이 부당하게 제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 전 차장이 헌법재판소장을 비난하는 기사를 심의관으로 하여금 작성하게 한 건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으로, 복종 의무를 강요할 수 없는 위법·부당한 지시이자 명령이다.

“피고인(임 전 차장)의 주장과 같이 명백한 위법사항에 대해서만 복종 의무가 없는 것으로 보면, 공무원이 명백히 위법한 지시를 해야만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피고인 주장에 따르면 공무원이 내린 지시가 겉으로 보기에 명백히 위법하지 않다면 위법한 지시를 해도 된다는 게 되는데, 어떻게 이런 걸 법치국가에서 허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공직사회 내의 상하관계에서의 직권남용 자체가 부정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2019년 3월26일 임종헌 전 차장 재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2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2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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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의무의 경계선, 그려질까

공무원 사회의 복종 의무는 어디까지인지 적정한 경계가 그려질 수 있을까.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심의관 다수에게 전달한 지시나 명령의 내용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뜯어보고 유무죄를 판단해야 한다.

이와는 별개로 법원 내부의 정책적 변화는 있다. 행정 업무에서 판사를 배제하는 ‘탈판사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8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의 관료적인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외부 인사가 사법행정에 관여하는 사법행정회의를 신설하고, 그 조직에는 상근 법관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법관을 관료적 문화와 상명하복 논리에 순치시켜왔다는 비판을 고려한 결과다. 논란도, 이견도 있지만, 개혁안은 더디게, 단계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의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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