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관여’ 의혹으로 탄핵 재판을 받는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헌법 위반행위’를 선언한 법관대표회의 내 특정 연구회 비율을 밝혀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요구하자, 판사들이 “전형적 물타기”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임성근 전 부장판사 쪽은 지난 1일 법관대표회의 내 국제인권법연구회·우리법연구회 소속 구성원 비율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의 사실조회 신청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임 전 부장판사 쪽은 지난달 24일 열린 변론 준비기일에서도 “당시 법관대표회의 의장이 최기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인데, 임원진 중 과반이 특정 연구회 소속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어 사실인지 사실조회 신청을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특정 성향의 판사들이 일방적으로 토론을 주도했을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6일 <한겨레>는 2018년 11월19일 열렸던 법관대표회의 회의록을 입수해 분석해봤다. ‘재판 독립 침해 등 행위에 대한 헌법적 확인 필요성 선언’ 의안을 처음 제안한 ㄱ
판사는 “형식적으로 직권남용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사법행정권 남용사태가 정당한가”라고 물으며 “권력분립 원칙을 훼손한 것은 물론이고, 재판 독립 원칙도 훼손한 행위”라고 말문을 열었다. 판사들은 이후 36차례 찬반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이어갔다. (편집자주 : 찬성 의견은 초록색, 반대 의견은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의안에 반대하는 판사들은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원이 특정 행위를 규정해 헌법 위반행위라고 선언하는 것은 섣부르다며 신중론을 내놨다.
“탄핵 소추는 입법부 권한이어서 국회에 간접적으로나마 의견 제시 형태로 강요하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ㄴ판사)
“수사 중이고 기소 여부를 앞둔 시점에서 탄핵절차 개시를 촉구하는 것은 여론 재판으로 흐를 수 있고 수사 등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헌법기관인 법관 개개인을 대표하는 법관대표회의에서 의결해 정치적 논쟁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ㄷ판사)
이에 ㄹ판사는 “앞으로 판사 개인이 무조건 시키는대로만 하지 않고 독립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이 의안에 대해 논의하고 결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반론을 폈다.
그러자 ㅁ판사는 “언론에 보도된 사실관계를 토대로 집단적으로 규범적 표명을 하는 것은 법관 본분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맞받았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판사들의 자정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반성론도 등장했다.
ㅂ판사는 “찬반은 (법원) 내부 논리가 아니라 국민에게 주는 메시지를 갖고 판단해야 할 사안”이라며 “적어도 법관들의 인식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ㅅ판사도 “우리는 늘 신중론을 이야기해왔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현실은 우리 인식을 앞서갔다. 이 의안은 현재 여론이 탄핵에 이르렀다면 그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사법부가 재건하게 된다면 그 길을 택하겠다는 자기선언”이라고 강조했다.
ㅇ판사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우리의 자정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견을 보탰다.
이명박 정부 시절 신영철 전 대법관(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 ‘광우병 촛불 집회’ 재판에 개입한 재판권 독립 침해 사례도 다시 언급됐다.
“신영철 전 대법관의 재판독립 침해 사태 때 정확한 헌법적, 법률적 판단과 정확한 책임조치를 하지 못해 여기까지 왔다. 법원 내부에서 이 사안을 포섭할 수 없는 법률적인 판단으로만 공권적 해석이 끝날 경우 법원이 앞으로 10, 20년 후에 이 사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도 두렵다”(ㅈ판사).
다만 “탄핵을 국회에 요청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이고, 국민은 판사들이 정치적 행위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우려도 여전했다.
2018년 11월19일 오전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 이날 회의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연루 판사들에 대한 탄핵 촉구 결의안' 등이 논의됐다. 백소아 기자
“시켜서 했다고 면책 안 돼” vs “아랫사람들만 남아”
사법농단 의혹에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이미 퇴직한 상황도 중요한 의제로 올라왔다.
ㅊ판사는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중요한 사람들이 퇴직한 상태이기는 하나, 위에서 시켜서 했다는 것만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짚었다.
ㅋ판사도 “탄핵절차는 나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통해 나간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헌법적 판단을 받아 볼 기회가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ㅌ판사는 “아랫사람들만 남아 있어 우리가 다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결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비겁한 행동일 수 있다. 징계양정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찬성했을 때 그 정치적 의미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경험상 법원 내부 일에 외부세력이 개입해 그다지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취지다.
36차례 찬반 의견…임 전 부장판사 주장에 “전형적 물타기”
토론 말미에 ㅍ판사는 “우리는 법원행정처 관계자가 특정 재판에 관해 정부 관계자와 재판 진행 방향을 논의하고 의견서 작성 등 자문을 해 준 행위나 일선 재판부에 연락해 특정한 내용과 방향의 판결을 요구하고 재판 절차 진행에 관해 의견을 제시한 행위가 징계절차 외에 탄핵소추절차까지 함께 검토돼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는 수정안을 제안했다.
투표가 진행됐고, 결과는 찬성 53명, 반대 43명, 기권 9명으로 ‘재판 독립 침해 등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의견’ 안이 의결됐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론 끝에 의결에 이른 만큼 판사들은 ‘법관대표회의 내 인권법·우리법 비율을 밝혀달라’는 임 전 부장판사 쪽 주장이 “논점 흐리기”라고 비판했다. 한 판사는 “당시 법관대표회의가 토론을 벌인 배경이나 정의마저 무시한 전형적인 물타기 주장”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판사도 “임 전 부장판사의 재판권 침해 행위가 법관탄핵 사유에 해당하는지 다투는 상황에서 3년 전 법관대표회의 의결에 의혹을 제기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지난 2월 법관 정기 인사 뒤 새로 구성된 법관대표회의는 오는 12일 첫 정기 회의를 열 예정이다.
조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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