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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현장에서] “필리핀에선 강간당해도 출산” 김행의 발언 해석해보기

등록 2023-09-22 06:00수정 2023-09-22 09:01

“가짜뉴스 퇴치부 장관 후보자같다” 언론 비난
위기의 임산부·출생아에게 관용 필요하다며
이들에 대해 시혜적인 태도로 내비쳐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자신을 비판한 언론 보도를 두고 “가짜뉴스를 넘어 살인병기”라며 날을 세웠다. 분노에 찬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2012년의 김행’이었다.

김 후보자는 21일 입장문을 내어 “‘여성이 설사 강간을 당해 임신했더라도 낙태는 불가하고 무조건 출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단 1초도 가져본 적이 없다”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아닌, ‘가짜뉴스 퇴치부’ 장관 후보자 같다”고 언론의 검증 보도를 비난했다.

김 후보자가 발끈한 보도는 김 후보자가 2012년 9월 자신이 창업한 매체 ‘위키트리’의 유튜브 채널에서 발언한 내용을 담은 기사들이다. 전날 언론들은 김 후보자의 영상 속 발언을 바탕으로 ‘강간당해서 출산해도 수용하는 필리핀식 관용 필요’, ‘김행 “강간 출산 수용할 톨레랑스”…코피노엔 “잘못된 아이”’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김 후보의 주장대로 언론이 ‘가짜뉴스’를 보도한 것인지 해당 영상 발언과 비교하면, 그렇지 않다. 김 후보자는 영상에서 “낙태(임신중지)가 불법인 필리핀에서는 한국 남자들이 여성을 취해서 (임신을 시키고) 도망쳐도, 필리핀 여성들은 애를 낳는다”며 “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같으면 외국 사람이랑 잘못된 아이를 낳았으면 버리거나 입양하거나 낙태를 하는 초이스를 할 텐데 필리핀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고 말했다.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필리핀 사람들에겐 합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방법이 없는데, 이를 두고 ‘낙태(임신중지)’를 선택하는 ‘한국 사람’과 비교한 것이다. 마치 필리핀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어 임신중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김 후보자는 해당 영상에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필리핀의 문화를 ‘관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설명했다. 그는 “너무 가난하거나 남자가 도망가거나 강간당하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톨레랑스’(관용)가 있으면 여자가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본다. 필리핀은 여자가 뭘 해서라도 키운다고 한다”고 말했다. ‘관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더라도 여성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발언은, 성과 재생산권 논의를 납작하게 만들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필리핀 여성이 불법 임신중지 시술에 내몰리는 현실을 외면한 발언이기도 했다. ‘필리핀 안전한 낙태 옹호 네트워크’(PINSAN)은 2020년 기준 임신중지를 한 필리핀 여성을 126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안전하지 않은 불법 임신중지 시술로 매일 최소 3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함께 전하며 김 후보자의 발언이 여가부 장관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 후보자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김 후보자는 이날 입장문에서 “이 발언의 방점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적에’”라며 “이들을 여가부에선 위기 임산부, 위기 출생아라고 한다. 여가부의 정책 서비스 대상이다. 당연히 여가부와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이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김 후보자는 해명을 할수록 자신이 가진 사회적 편견만 노출했다. ‘위기의 임산부·출생아’를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사회적으로 차별없이 대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시혜적인 태도로 관용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문제의 유튜브 방송에서 외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잘못된 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해명의 마무리는 ‘후레자식론’이었다. ‘후레자식’은 여성이 홀로 키운 자녀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속어인데, 김 후보자는 입장문에서 소설 ‘객주’를 쓴 김주영 작가가 아버지 없이 자라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밝히며, “김주영 선생님이 후레자식입니까? 공지영 작가님께 편견을 갖고 계십니까? 전 없다”며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답변했다. 이어 특정 여성들의 출산을 이 단어에 빗대기도 했다.

김 후보자의 임신중지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반헌법적인 생각은 그의 발언으로 엿볼 수 있다. 그는 불과 일주일 전인 지난 15일에 기자들과 만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그럴듯한 미사여구에 감춰진 ‘낙태’(임신중지)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겠다”라며 임신·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이가 여가부 장관이 되는 게 적절할까.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여성의 임신중지권이, 헌법 제10조에서 정하는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된 자기결정권의 핵심이라고 판단하며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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