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의 여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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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각종 기념일에 무심한 편이다. 얼마 전엔 작은아이 생일을 지나쳐 당사자를 섭섭하게 했다. 이 녀석은 생일날 아침 미역국이 없어 저녁에 깜짝 파티를 기대했다나. 근데 웬걸, 생일날 밤에 찬밥을 데워 먹고 잔 녀석이 다음 날 아침 잔뜩 부어 엄마의 무성의를 규탄했다. 아이쿠! 아이 생일도 못 챙기는 판이니 내 생일을 굳이 챙길 일은 더더구나 없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3년 연속 결혼기념일을 무심히 지나쳐 남편이 섭섭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엔 수첩에 적어놓은 덕분에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사실 이날은 내게 불리하다. 사과해야 할 일투성이인 날. 지난 일년도 욱한 성미 때문에 번번이 남편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점심상을 갈치, 조기와 가자미까지 구워 생선구이 3종 세트로 차렸다. 후식은 사과. 방학인 아이들과 마침 들르신 친정엄마까지 식탁에 앉았다. 매사에 달팽이처럼 느린 남편과 성미 급한 내가 23년을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신기해하셨다. 아이들도 동감을 표시한다. 난처한 기념일.
30대와 40대 무렵엔 남편에게 생일 선물이나 결혼기념일 선물을 기대했다. 목걸이를 받은 적도 있고 백화점 옷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몇 해 전부터 생일 선물에 무심해졌다. 안 받아도 그만, 전혀 서운하지 않다. 덩달아 외식 취미도 시들해진다. 대범해진 건가? 무감각해진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이 드는 징조?
남편이 아내 생일을 챙기지 않아 일년 내내 화가 났다고 친구가 하소연을 한다. 선물을 기대한 게 아니라 “해피 버스데이 투 유”라는 말이 듣고 싶다는 친구. “그럼 혼자서 해피 버스데이 투 미를 외치고 케이크를 자르지 그랬어?” 친구가 놀란다. 가장 가까운 상대인 남편의 생일 축하와 선물을 받고 싶은 건 한편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일이나 기념일을 잊고 지나쳤다고 일년 내내 섭섭할 것까지야 있나? 굳이 남편의 축하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 “해피 버스데이 투 미!”를 소리 높여 외쳐보자. 남편이 내 생일 축하를 잊어버린다고 해도 내 존재의 우주적 의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스스로 자가 발전기를 가동시켜 삶의 기쁨을 만들어내는 자급자족 정서 생활, 괜찮지 않은가? 그리고 내 생일날 나를 낳느라 외로운 사투를 벌였던 친정엄마께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엄마를 찾아갈 때는 반드시 꽃단장 할 것. 엄마의 작품 딸이 어여쁘고 행복하게 살아있음을 느끼실 수 있게.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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