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프라이즈 그리스’ 직원인 에바 밀리크가 게로바실리우 와이너리 포도밭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윤동길 제공.
키르야니, 부타리, 알파, 게로바실리우. 3년 전부터 한국에 진출한 그리스 와이너리들이다. 이름도 생소한 이 와이너리들은 와인사에 오랫동안 남을 공로를 세웠다.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그리스 토착 품종 크시노마브로와 말라구시아의 전성기를 열고,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에 알린 것이다. 10여년 전 유럽 시장에 진출한 뒤 그리스 와인의 참신한 맛과 향을 알리는 구실도 톡톡히 했다. 키르야니와 부타리는 레드와인 품종인 크시노마브로를, 게로바실리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화이트와인 품종의 말라구시아를 되살렸다. 지금 이 와이너리들은 그 기세를 몰아 토착 품종 보존·개발 및 제조 방식 다변화 등을 통해 화려한 성공을 꿈꾸고 있다. 지난달 31일부터 8일까지 그 현장을 다녀왔다.
오스만투르크때 지어진 초소가 키르야니 와이너리 포도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사진 윤동길 제공.
와인의 과학적 접근, 키르야니
지난 2일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령 나우사에 위치한 키르야니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베르미오 산의 만년설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따스한 햇볕과 온화한 바람과는 대조적이었다. 베르미오 산의 남동쪽, 해발 100~300m의 완만한 경사면에 넓게 펼쳐진 포도원. 키르야니는 토양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해 토착 품종 크시노마브로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15명의 연구자들이 토양, 재배기술, 양조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다. 스텔리오스 부타리스 키르야니 대표는 “우리만큼 크시노마브로의 특징을 잘 아는 곳이 없다. 크시노마브로의 개성을 살린 다양한 와인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키르야니 와인은 30개국에 수출된다.
포도밭 사이로 창고 같은 건물이 보였다. 람브로스 파파디미트리우 마케팅이사는 “오스만튀르크 때 지어진 초소다. 포도원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이제는 상징물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세계적 명성의 와이너리, 부타리
토착 품종 크시노마브로는 재배가 까다롭다. 테루아르(토양)와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향의 차이가 크다. 돌연변이가 많고, 토양에 따라 수확량도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잘 만든 크시노마브로는 ‘시고(xino) 검다(mavro)’는 뜻의 이름처럼 산도와 타닌 향이 강할 뿐 아니라 과일, 흙, 연기 등을 아우르는 독특한 향을 낸다. 키르야니와 더불어 크시노마브로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곳이 부타리 와이너리다. 부타리는 세계적인 와인 잡지 <와인 앤 스피릿>이 선정하는 세계 톱10 와이너리로 오른 적이 있다. 세계적인 와인 대회 수상 경력도 다수다. 조지 카넬리디스 재배책임자는 “세계 45개국에 와인을 수출한다”고 말했다. 실제 2일, 부타리 와이너리에서 시음해본 부타리 와인들은 혀에 ‘신세계’를 선물했다. 크시노마브로 품종으로 만든 로제와 로제 스파클링 와인은 체리 향과 딸기 향이 어우러져 상쾌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는 “국내에서는 너무 저평가되어 있지만, 와인 애호가라면 그리스 스파클링 와인의 고급스러운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알파 와이너리 임직원들이 생산한 와인의 품질을 검수하고 있다. 사진 윤동길 제공.
최신식 시설로 승부, 알파
아민데오에 위치한 알파는 최신식 시설을 갖춘 포도원과 와이너리를 자랑한다. 포도나무에 물을 주는 파이프를 땅속에 매립했다. 땅의 습도를 센서로 체크해 필요할 때 적정량만 주는 물 공급 시스템도 갖췄다. 또 지하 숙성고를 포함한 건물까지 와인 생산에 필요한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자동온도제어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콘스탄티노스 아르바니타키스 수출담당이사는 “갓 수확한 포도를 냉장 상태로 보관해 섬세한 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게 특징”이라며 “와이너리 관리 역시 각 담당자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체크하도록 전자동시스템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고대 궁전 같은 코스타 라자리디 세계적 대리석 산지인 드라마 지역에 터를 잡은 와이너리 코스타 라자리디는 건물이 아름다웠다. 드넓은 포도밭 중간에 고대 그리스 궁전처럼 자리잡은 와이너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빼어난 와이너리 풍경 못지않게 와인 맛도 특별했다. 그림 같은 와이너리는 코스타 라자리디만은 아니다. 파블리디스, 와인 아트 에스테이트 등도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풍광만큼이나 와인의 맛도 감동을 선사한다. 4일 저녁 와인 아트 에스테이트에서 생산한 ‘테흐니 알리피아스 로제 2016’ 와인을 해산물을 곁들인 리소토와 송아지 고기와 함께 맛봤다. 경쾌한 맛과 발랄한 향 때문에 ‘슬픔이여 가라’는 와인 이름이 절로 튀어나왔다.
파블리디스 와이너리 전경. 사진 윤동길 제공.
과학과 와인의 접목, 파블리디스
자연과 과학을 접목한 와이너리도 있다. 드라마 지역에서 서쪽으로 17㎞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블리디스 와이너리가 그런 곳이다. 1998년 크리스토포로스 파블리디스가 설립한 이래로 ‘장인정신을 담은 프리미엄 와인’ 생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파나요티스 키리아키디스 와인 매니저 겸 디렉터는 “싱싱한 상태 유지를 위해 밤에만 포도 수확을 하고, 부드러운 즙만 짜내기 위해 과한 압력을 가해 착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산된 와인들은 아침이슬처럼 신선하고 갓 짠 우유처럼 매우 부드러워 목넘김이 좋다.
토착 품종 실험의 선구자, 게로바실리우
테살로니키에서 남쪽으로 약 30㎞ 떨어진 에파노미에 위치한 게로바실리우 와이너리는 와인 명성 못지않게 ‘박물관’이 유명하다. 에방겔로스 게로바실리우 대표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수천점의 희귀한 포도 압착기, 와인양조 도구, 와인병 등으로 꾸민 전시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 주목해야 할 건 토착품종 개발을 향한 게로바실리우의 끈기와 노력이다. 그는 사라질 뻔한 그리스 화이트와인 품종 말라구시아를 되살린 주인공이다. 프랑스 보르도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한 이답게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엔 화이트와인 토착품종 키도니차 재배 실험을 하고 있다.
아민데오·드라마·에파노미(그리스)/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