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 화이트 타워 전망대에서 만난 그리스의 젊은 여성. 청바지 차림에 선글라스와 머플러로 멋을 냈다. 사진 윤동길 제공.
어깨와 목이 드러난 ‘원 숄더 톱’(한쪽 어깨만 드러나는 윗옷)에 허리 아래로 옷 주름이 깊게 들어간
신화 속 아프로디테의 드레스. ‘그리스 패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실제 그리스의 대표 의상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트로이>, <300> 등에서 보듯, 허리 라인이 잘록하면서도 헐렁한 튜닉, 장방형의 천을 몸에 둘러 핀으로 고정시켜 입는 키톤이다.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튜닉 스타일이 수영복 위에 입는 비치 원피스 형태로 출발해 뒤늦게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마치 그리스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세련미 흐르는 로맨틱룩으로 오래전부터 사랑받았다.
유인영 스타일리스트는 “튜닉 스타일은 몸통과 허리 아래쪽으로 옷 주름이 많아 몸집 작은 한국 여성들에겐 주목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며 “최근 들어서는 에스닉 인기와 맞물려 그리스 의상에서 변형된 블라우스, 원피스, 스커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 화이트 타워 주변에서 만난 그리스의 젊은 여성. 청바지와 가죽재킷, 운동화로 멋을 냈다. 사진 윤동길 제공.
현재 그리스 현지의 패션은 어떨까. 그리스 출장이 확정되고 난 뒤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그리스 패션’이었다.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 등은 유럽 역사의 시작인 그리스·로마 시대에 가장 핫한 ‘패션 도시’였다고 한다. 이제는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 등에 밀려 작은 흔적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명맥이 일부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리스 제2의 도시이자 북부의 중심지인 테살로니키(그리스령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도시)는 오래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기에 유럽 문화가 강세인 중부의 아테네와는 다른 독특한 패션 문화가 존재하지 않을까.
크레타 섬 헤라클리온 시내 상점가 풍경. 서울의 명동과 흡사하다. 김미영 기자.
한국이야 그리스야?
테살로니키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한국 젊은이들의 패션의 시작은 이 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내 중심지인 아리스토텔레스 광장과 갈레리우스 궁전 인근의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의상은 ‘서울 명동’과 비슷했다. 가죽 또는 청재킷, 점퍼 차림 일색으로 평범하고 단순해 보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청바지에 편안한 운동화나 스니커즈, 단화 일색이었는데 남녀 모두 화려한 머플러로 멋을 살린 것이 이색적이었다. 같은 색, 모양, 소재의 머플러를 두른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머플러는 그리스 ‘패피’(패션 피플)들의 ‘잇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테살로니키시 아리스토텔레스 거리에서 만난 안나 코스마(23)는 “요즘 20대들 사이에선 유행과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살려 입는 것이 대세”라고 말했다.
테살로니키에서 비행기로 1시간20분 정도 걸리는 그리스 최남단 크레타 섬의 번화가 베니젤로 광장 주변 상점가에서 만난 이들의 옷차림도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더 따뜻한 지역이어서 긴팔 티셔츠가 반팔, 청바지가 반바지, 점퍼가 조끼 등으로 가벼워졌을 뿐이다.
테살로니키 중심가 딤 구나리 거리에 있는 보세 매장에서 한 시민이 옷을 구경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테살로니키 도심의 상점가에서 주목할 만한 특색을 찾기는 어려웠다. 한국처럼 자라, 에이치앤엠, 버쉬카, 갭, 마시모 두띠 등의 스파(SPA, 기획·생산·유통·판매를 한 회사가 하는 옷) 브랜드 매장들이 다수였다. 그리스에서도 스파 브랜드가 유행의 흐름을 좌우할까. 한국처럼 이런 스파 브랜드의 인기는 꾸준하다고 한다. 차이점이라면 패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레갈리나스(regalinas.gr), 슈거프리(sugarfreeshops.com), BSB(bsbfashion.com), 아트라티보(attrattivo.gr) 등의 그리스 토종 브랜드가 더욱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브랜드보다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하는 보세 의류의 인기는 여전했다. 중심가의 보세 매장을 둘러보니 팔리는 의상은 색 바랜 구제품 위주의 빈티지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20대들과 취향이 비슷했다. 청바지 조각을 덧대어 만든 스커트, 꽃무늬가 수놓아진 롱치마, 튜닉 스타일의 원피스와 블라우스 등이 인기 제품인데, 3유로(약 3000원)에서 5유로, 비싼 것은 10~20유로 선에서 구입이 가능했다. 안나 코스마 역시 빈티지 스타일을 선호해서 보세 의류 매장을 즐겨 찾는 편이라고 했다.
크레타섬 헤라클리온 시내 신발 매장의 진열대 풍경. 그리스 샌들이 눈에 보인다. 김미영 기자.
글래디에이터 신발은 필수?
한국 20대들에게 신발은 자신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특정한 브랜드나 종류와 상관없이 다양한 제품들을 골라 신는다. 이에 반해 그리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세는 ‘운동화’였다. 컨버스, 아디다스 스탠스미스 등 스니커즈 형태가 지난해부터 ‘잇 아이템’이라고 한다.
그리스로 떠나기 전부터 여름철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은 일명 글래디에이터 신발인 ‘그리스 샌들’이 궁금했다. 크레타 섬에서 만난 ‘그리스 샌들’의 추세는 갈색 톤에 바닥은 낮고, 끈이나 장식이 발등에 있는 전형적인 고대 그리스 형태가 다수였다. 하지만 발목까지 복잡하게 끈을 매야 하는 형태, 반짝이(글리터), 별 모양 등 화려한 제품도 꽤 됐다. 발목과 종아리의 곡선을 잘 드러내는 모양새에 반해버렸다. 하나 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미니멈 라이프’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크레타 섬의 중심 도시인 헤라클리온 신발 매장에서 만난 셀리아(28)는 “여름철 어떤 색깔의 치마와도 잘 어울릴 만한 샌들을 사려고 한다”며 “무난한 갈색보다는 반짝거리는 글리터 색상 중에서 고를 예정”이라고 했다.
테살로니키 중심가 딤 구나리 거리에 있는 상가 매장에 진열된 머플러들. 김미영 기자.
그리스 물가는 싼 편이다. 덕분에 염색·파마 등의 헤어스타일 변화와 네일아트 등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는 젊은층도 꽤 된다. 실제 테살로니키와 헤라클리온 시내 곳곳에서는 헤어살롱과 네일숍 등이 한국 대도시만큼이나 자주 눈에 띄었다. 아테네에 사는 비키(35)는 “일주일에 1~2번 헤어살롱에 가고, 네일숍도 주기적으로 방문한다”며 “브랜드 의류 중에서는 저렴하면서도 귀여운 스타일의 레갈리나스를 가장 선호한다”고 말했다.
테살로니키 중심가 딤 구나리 거리에 있는 상가 매장에 진열된 선글라스들. 김미영 기자.
선글라스·턱수염 ‘핫 아이템’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 때문에 그리스에서 선글라스는 필수품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90% 이상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선글라스 전문매장 외에도 거리 곳곳에서 싸구려 ‘짝퉁’ 선글라스를 파는 상점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됐다. 가방은 편리성과 실용성이 장점인 배낭, 액세서리는 단조로운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화려한 보석이 박힌 ‘터키’ 혹은 ‘에스닉’ 스타일이 인기몰이 중이었다.
테살로니키 중심가 딤 구나리 거리에 있는 상가 매장에 진열된 액세서리들. 김미영 기자.
그리스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머리 모양은 패션을 완성해주는 최후의 보루였다. 금발, 갈색 등으로 염색한 스타일도 많았고, 머리 길이뿐 아니라 파마를 통해 개성을 표출한 이들도 종종 보였다. 턱수염을 기른 젊은 남성들이 유독 많은 것도 이채롭다. 비키는 “10~20대 남성들 사이에 턱수염이 유행해, 40%가량이 수염을 기른다”며 “여성들 사이에서 남성의 턱수염이 멋과 섹시함을 더해준다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테살로니키 중심가 딤 구나리 거리에 있는 상가 매장에 진열된 가방들. 김미영 기자.
그리스는 현재까지도 심각한 재정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암울한 경제 상황이 패션에서도 여파를 미친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경제 침체기 패션은 옷차림의 획기적인 변화보다 액세서리와 소품 등으로 개성을 살리는 소극적인 변화가 두드러진다. 실제 그리스에서는 원색이나, 밝고 화려한 파스텔 톤의 페미닌·로맨틱룩이 한국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유명 스파 브랜드의 경우 한국보다 10~30% 저렴한데도 말이다.
테살로니키·크레타 섬(그리스)/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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