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명의 발상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 전경. 김미영 기자
크레타 섬은 에게해 남쪽에 자리한, 그리스의 가장 큰 섬이다. 동서 길이 260㎞, 넓이 8336㎢로 제주도의 약 4.5배에 이른다.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고향이자 유럽 문명의 발상지다. ‘유럽’이란 명칭의 어원이 되는 ‘에우로파’ 신화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신화에서 제우스는 페니키아 공주인 에우로파를 보고 첫눈에 반해 하얀 황소로 변신하고는, 에우로파를 등에 태우고 놀다가 지중해 건너 크레타 섬에 정착한다고 한다. 이후 제우스와 에우로파는 세 아들을 낳는데, 큰아들이 청동기 시대 미노아 문명(BC 3650년경~BC 1170년경)의 전성기를 이끈 미노스 왕이다. 고대 크레타의 도시 크노소스는 미노스 왕국의 수도로, 문명의 중심지였다.
지난달 6일 크레타섬의 주도 헤라클리온에서 남동쪽으로 5~6㎞ 떨어진 곳에 있는, 미노스 왕국의 대표 유적지 크노소스 궁전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들머리 오른쪽에 서 있는 ‘아서 에번스’의 흉상이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는 1900년부터 35년 동안, 4000여년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던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사람이다. 궁전을 안내한 리나는 “아서 에번스는 자비로 이 터를 사들인 뒤 크노소스 궁전 발굴과 복원, 연구에 힘썼다”며 “궁전과 유물을 사유화하거나 영국으로 반출하지 않고 그리스 정부에 귀속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 흉상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크노소스 궁전이 옛 모습 그대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에번스가 정확한 자료와 고증 없이 서둘러 복원을 시도하면서 유적 상당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과거 궁전 대부분의 건축 재료인 목재를 시멘트로 바꿔 복원했다. 기둥을 새로 만들거나 옮기기도 하고, 벽화에 색을 덧칠하기도 했다. 발굴의 편의를 위해 파괴한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한다. 크레타 주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던 이유다.
지금은 그 터와 형체 일부만 남아 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가로세로 160~170m에 이르는 크노소스 궁전의 위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2~5층(평균 4층) 규모의 건물은 ‘미궁’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1400여개의 방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왕의 궁전과 별궁, 신하들의 주거 공간, 일반 주택, 사제들이 있던 제단, 금속·석재 가공소, 곡물 저장소, 수세식 화장실 등도 갖췄다. 궁전을 중심으로 반경 2㎞ 주변에 8만여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미노아 시대 의식행사에 사용된 것으로 추천되는 황소 머리 모양의 술잔. 김미영 기자
하지만 알맹이는 쏙 빼고 껍데기만 본 기분이 들어 아쉬웠다. 이곳은 터만 남아 있어 발굴된 유적들은 볼 수 없다. 크노소스에서 부족했던 2%를 채워줄 곳이 헤라클리온 항구 부근에 있는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이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들의 원본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그릇과 잔, 무기, 금으로 된 팔찌·귀고리·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 화려한 색깔의 벽화 등을 보는 것만으로 크레타 섬이 왜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지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뿔 모양의 술잔, 물고기와 문어 등이 그려진 도자기들, 가슴을 드러낸 채 뱀을 들고 있는 ‘뱀의 여신상’ 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크레타 문명의 진수를 보여줬다.
헤라클리온 항구와 베네치아 성재. 김미영 기자
헤라클리온 항구 주변엔 이외에도 가볼 만한 곳이 많다. 에게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 항구 중심부인 베니젤루 광장의 모로시니 분수, 아요스 티토스 교회, 그리고 그 주변을 따라 펼쳐지는 쇼핑 거리와 카페 및 식당가, 항구 근처의 베네치아 성채 등이다. 헤라클리온 시내 지도를 잘 활용해 동선을 짠다면 크레타 섬의 역사와 문화, 멋과 맛을 즐기는 데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크레타 섬/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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