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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코로나19’ 시대의 예의범절

등록 2020-03-18 21:12수정 2020-03-19 15:59

마스크를 쓰고 회사 건물 입구에 도착한 이아무개(36) 과장은 줄부터 섰다. 건물 관리실에서 다른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회전문 하나만 열어둔 탓에 출근 인파가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열화상 카메라를 통과하고 손세정제를 손에 잔뜩 뿌려 문지른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사무실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쥐죽은 듯 조용했다. 지하철에서부터 마스크를 쓰고 왔더니 귀 뒤가 당겼다. 몇주째 같은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코끝에도 작은 상처가 났다.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마스크를 벗고 싶었지만, 벗지 않았다. 얼마 전 겪은 작은 사건 때문이다. 불과 두주 전만 해도 사무실 안에서는 다들 마스크를 벗고 업무를 봤다. 그러나 회사 인근에서 코로나19 감염 확진자가 나온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뉴스를 접하지 못한 이 과장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하루는 별생각 없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부하 직원인 김 대리에게 업무 지시를 하던 중 ‘어쩐지 김 대리가 나를 피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과장은 김 대리에게 농담으로 “알겠다, 알겠어. 말 그만 걸게”라며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이 대리에게 “과장님 그런 거 아닙니다”라는 카톡이 왔다.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에 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미어캣처럼 살며시 파티션 위로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이 무례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만나야 취재를 할 수 있는 기자들도 새로운 예의에 적응하느라 고민이 많다. 후배 기자 중 하나는 얼마 전 한 취재원과 만난 자리에서 마스크를 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딜레마에 빠졌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마스크를 벗지 않는 것이 예의인지, 벗는 것이 예의인지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다. 나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스튜디오 실장과 촬영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보통 때라면 명함을 내밀고 악수를 교환하며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예의가 예의가 아닐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순간 손세정제가 보였다. 나는 수타면을 뽑기 위해 손에 밀가루를 뿌리는 중식 셰프처럼 손세정제를 손에 잔뜩 묻혀 ‘탁탁’ 소리를 내며 바르고 수술실에 들어서는 외과의사처럼 공기 중에 말린 뒤 악수를 청했다. 예전에 한 친구가 “예의란 굳이 어렵게 하지 않아도 될 동작을 필요보다 과장되게 격식을 갖춰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세 아이의 아빠인 내 친구는 요새 ‘놀이터의 딜레마’에 빠졌다. 유치원 방학이 길어지면서 아이들이 집안에 갇힌 망아지처럼 뛰노는 통에 하루하루가 럭비 시합처럼 힘들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놀이터에 방사하고 벤치에 앉아 잠시 하늘을 보며 쉬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다. 문제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은 다른 집 아이들과 마주쳤을 때다. 친구는 “마스크 벗겠다는 애한테 겨우 마스크를 씌워서 왔는데, 다른 애들이 마스크를 안 쓰고 있으면 상황이 난처해진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자기 애가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은 친구를 보고 자기도 마스크를 벗겠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친구는 “아이들이 모두 마스크를 벗겠다고 난리를 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섰다”라며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아이들 건강 문제가 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더라. 그렇다고 마스크를 안 쓴 아이의 부모에게 오지랖을 떠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전 세계가 처음 접해보는 코로나19 시대가 새로운 예의범절을 만들고 있다.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회사가 늘면서 지나간 시대의 예의범절이 시험대 위에 놓이기도 한다. 국내 굴지의 금융 회사에 다니는 김아무개(46) 팀장은 재택근무를 하다 후배 차장이 올린 결재 서류를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부장의 승인이 필요한 서류였기 때문이다. 그가 배운 대로라면 전자 결재를 올리기에 앞서 예쁘게 뽑은 결재 문서를 서류철에 꼽아 들고 본부장 방문을 두드려 깍듯하게 인사를 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전자 결재만 받아도 효력은 있지만, 상세히 설명해 드리고 종이 서류에 사인을 받는 것이 예의다. 결국 김 팀장은 재택근무 중에 ‘회사에 나갈 수밖에 없는 사유’를 만들어 오프라인 결재를 받았다. 그러나 재택근무 중에 결재를 받으러 나가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떴다. 과연 필요한 과정일까? 오래전 전자 결재가 도입될 때도 예의를 위해 살아남았던 종이 서류가 코로나 시대를 맞아 흔들리고 있다. 영업직군인 김 팀장은 “변한 건 근무 형태만이 아니다”라며 “관계사 직원과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잡을 때도 반상에 1인분씩 올라오는 곳을 찾는다. 곧 한 솥에 나온 찌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식문화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한국 사회의 예절과 문화, 특히 식문화는 꽤 크게 바뀔 것”이라는 게 예의범절과 음식 문화의 최전선에서 15년을 보낸 삼성동 회사원의 예측이다.

글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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