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28일 오후(현지시각)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 대한민국과 가나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조규성이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2022 카타르월드컵 축구 열기가 뜨겁다. 대륙별 지역 예선을 통과한 32개국이 본선에 진출해 혈전을 치르고 있다. 이번 대회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경기 사상 처음 아랍 이슬람권 국가가 주최했다. 중동의 뜨거운 날씨를 피해 겨울(지구 북반구 기준)에 열린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만 선수들의 투혼과 관중의 환호는 열사의 사막보다 후끈하다.
월드컵 축구는 올림픽과 함께 지구촌 스포츠 축제의 양대 산맥이다. FIFA 월드컵은 축구라는 단일 종목 경기인데다 본선 참가국 수도 올림픽 참가국보다 훨씬 적다. FIFA 회원국은 211개국으로, 유엔 회원국(193개)보다 많다.
축구는 수많은 스포츠 경기 중에서도 게임 규칙이 매우 단순하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종목이다.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스포츠의 발생에 대한 설명은 크게 유희 기원설, 사냥 기원설, 전쟁 기원설이 있다. 유희 기원설은 스포츠가 놀이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의례·축제·유희 연구의 권위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의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 목록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보탰다. 그는 자신의 책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놀이는 에너지 발산, 모방 본능, 긴장 해소, 경쟁과 지배 욕망 등 ‘생물적 특성’을 지닌 목적의식적 행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열광·몰두·광분 등 원초적 특징을 설명하지 못한다며, 놀이의 본질은 ‘재미’라고 주장했다. 하위징아는 “고대인의 생각 속에는 전쟁과 놀이의 두 개념이 절대적으로 혼융돼 있었다”며 스포츠를 그런 행위 유형의 하나로 봤다.
유럽어에서 ‘스포츠’(Sport)라는 단어는 ‘즐거움을 찾다’ ‘즐겁게 놀다’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Desporter’에서 유래한다. 라틴어 ‘Disporter’에 뿌리를 대고 있다. ‘Dis’(분리·분산·제거)라는 접두어와 ‘Porter’(물건 따위를 운반하다)라는 밑말의 합성어로, ‘기분을 전환해 신체적, 정신적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사냥 기원설은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축구 종족>이라는 책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나섰던 사냥이 점차 스포츠로 대체됐으며, 축구는 사냥 욕구를 충족해주는 대표적 운동경기라는 것이다. 모리스는 축구를 즐기는 사람을 ‘축구 종족’(Soccer Tribe)으로 규정했다.
그는 “공을 골문으로 겨냥하는 행위는 사냥감에게 무기를 조준하는 것과 같으며,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냥감을 해치웠음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축구단은 하나의 부족,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사냥에 나선 전사, 구단 이사진과 감독(트레이너)은 부족 원로, 구호·슬로건·환호성·야유 등은 부족 언어에 비유했다.
그리스 아테네 인근 도시에서 발견된 기원전 4세기 대리석 묘비 일부에 젊은 남성이 공을 다루고 시종이 지켜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 국립 고고학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전쟁 기원설은 스포츠의 원형이 전쟁, 또는 전사의 전투 훈련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축구는 그런 주장을 직관적으로 뒷받침한다. 잔디 경기장(탁 트인 들판)에서, 두 맞수 집단의 감독(지휘부)과 선수(전사)들이, 각각의 포지션을 나누고 전술을 세워, 상대의 골문(사령부)에 공을 차넣거나 엔드라인(최후방)을 통과(점령)해 득점(승리)하는 경기 형태는 전투 행위의 축소판처럼 닮았다. 축구 경기에는 슈팅(투사 무기의 발사), 대포알 슛, 전술, 태극전사, 명장, 전차군단, 무적함대 등 유난히 군사용어가 많이 쓰인다.
실제로 축구 경기가 과열돼 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을 앞두고 1969년 6월 북중미 지역 예선에서 국경을 맞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맞붙었다. 양국 팀은 1·2차전에서 난투극에 가까운 격전을 벌이며 각각 홈경기에서 한 차례씩 승리했다. 이어 멕시코에서 열린 3차전에서 한 장 남은 본선행 티켓을 두고 다시 격돌했다. 연장전까지 치른 접전 끝에 엘살바도르가 결정골을 터뜨려 3-2로 승리했다.
그러나 1·2차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양국 응원단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져 사망자까지 나올 만큼 악감정이 쌓인 뒤였다. 급기야 온두라스가 외교 단절을 선언하자 엘살바도르는 기다렸다는 듯 선전포고와 동시에 전차와 전투기까지 동원해 온두라스를 침공했다. 어처구니없는 축구 전쟁은 정치·경제적 갈등이 근본 원인이었지만 축구가 기폭제 구실을 했다. 전쟁은 닷새(100시간) 만에 주변국의 중재로 멈췄지만 두 나라가 평화협약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하기까지는 11년이 걸렸다.
반대로 생사가 갈리는 전쟁 중에 축구가 인간의 우호적 본성과 평화의 염원을 보여준 해프닝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첫해인 1914년 12월25일, 벨기에 전선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빗발치는 기관총탄을 피해 참호전을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오전 어느 쪽에선가 조용히 캐럴이 흘러나왔고, 전선에는 총성과 비명 대신 아름다운 캐럴 화음이 번져갔다. 갑자기 독일군 병사 두 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호에서 나와 영국군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독일군 병사의 손에는 총이 아니라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들려 있었다. 두 나라 병사들은 언제 치열한 교전을 벌였냐는 듯 무기를 내려놓고 술과 담배를 나누고 카드놀이와 축구 경기까지 즐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국 군 지휘부가 발칵 뒤집히면서 깜짝쇼 같은 ‘크리스마스 휴전’도 금세 막을 내렸다.
본디 스포츠는 개인 육상경기가 기본이자 원형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 탈레스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신체 운동, 정신적 균형, 삶을 향유하는 능력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플라톤은 <국가>(폴리테이아)에서 정의·절제·용기·지혜의 미덕을 갖추고 ‘탁월함’(Arete, 아레테)을 체현한 인물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꿈꿨는데, 이때 아레테에는 강건한 신체도 포함됐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신체의 탁월함으로 건강·아름다움·강인함·크기·운동능력을 꼽았다. 그리스의 ‘아레테’ 개념은 로마에서 ‘비르투스’(Virtus)로 계승됐다. ‘덕’ ‘선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버추(Virtue)의 라틴어 어원이다.
그리스 올림픽은 육체적 탁월함을 연마하는 경연장이었다. 통상 고대 올림픽으로 불리는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은 최고신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의의 중요한 일부였다. 출전 자격은 그리스 출신의 자유민 남자로 제한됐다. 선수들은 발가벗은 맨몸으로 개인 기량을 겨뤘다. 여성은 참여는커녕 관전도 엄격히 금지됐다. 닷새간 열린 행사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와 시 낭송으로 시작해, 5종 경기(원반던지기·창던지기·달리기·레슬링·멀리뛰기), 전차 경기, 갑옷 달리기, 격투기 등이 이어졌으며, 감사제와 연회로 막을 내렸다.
경기 종목은 사실상 전사의 전투 훈련과 같았다. 이는 전쟁과 외침이 잦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사정, 고대 전투가 창, 검, 방패 등 개인 장구와 체력을 사용한 백병전이었던 사실을 방증한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이 부활한 이후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 경기도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싸운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려 먼 거리를 달린 전령을 기리는 의미가 담겼다. 고대 5종을 계승한 근대 5종 경기가 펜싱·수영·승마·크로스컨트리·사격으로 종목이 바뀐 것도 중세 기병술과 근대 총포 무기의 발달을 반영한다.
올림픽 경기는 주로 전사 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개인 종목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집단 격투형 놀이도 없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7세기께부터 ‘에피스키로스’라는 경기를 즐겼는데, 오늘날 럭비풋볼의 원형에 가깝다. 한 팀에 12~14명이 공을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지면서 상대 진영의 엔드라인을 넘는 횟수로 승부를 가렸다. 보호장구는커녕 특별한 규칙도 없어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기원전 5세기에는 로마가 그리스의 공놀이와 비슷한 ‘하르파스툼’을 고안해 즐겼는데, 특히 로마군이 군사 훈련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해 집단전술을 익혔다고 한다. 병영 축구는 병사들의 단결과 전우애, 긴장감과 승리 욕구를 자극하는 데 유용했다. 고대 축구는 로마제국의 팽창과 함께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탈리아의 칼치오(Calcio), 프랑스의 술(La Soule), 영국의 슈로브타이드 풋볼, 아일랜드의 게일릭 풋볼 등은 모두 로마식 군대 축구의 후예들이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중국 전국시대에 ‘추쥐’(蹴鞠, 축국) 경기를 즐긴 게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는 한반도에도 명칭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김춘추와 사돈의 연을 맺기 위해 축국을 이용한 이야기가 전한다. 경기 중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지자 일부러 여동생 문희를 시켜 꿰매줬는데, 뒷날 문희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가 됐다.
축구는 경기가 너무 거칠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축구의 원시성을 도드라지게 했다. 동물 중에서 팔과 손을 쓰는 종은 영장류가 유일하다. 특히 손의 섬세한 감각과 정교한 움직임은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유일한 특징인 이성과 지능의 상징이자 문명 발달의 핵심 동력이다. 그런 손을 묶어둔 스포츠 종목은 축구가 유일하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 한’ 무용담은 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라는 우스갯말이 있지만, 요즘에는 축구를 직접 즐기는 여성도 크게 늘고 있다. 축구는, 나아가 현대 스포츠는 승부욕뿐 아니라 중세 기사도에서 유래한 스포츠맨십이 더욱 강조된다. 정정당당, 공정, 규칙 준수, 겸허함과 상호존중, 우정과 화합은 스포츠와 전쟁이 겉보기엔 닮았으면서도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대목이다. 스포츠는 그렇게 인류의 삶 속에 살아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조일준 선임기자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참고 도서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윤동일, <축구 전쟁> 장지원, <세상은 축구공 위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