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공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한국헌혈견협회 강부성 대표와 반려견 챨스, 남편 윤성희 씨와 헌혈견 로빈이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찰스는 몸이 작아 헌혈을 할 수 없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개가 수술을 받을 때, 수혈이 필요하면 누가 어떻게 공급할까. 수혈은 재생불량성 빈혈이나 면역성 혈소판 감소증, 양파 중독 등 내과 질환을 비롯해 교통사고로 외과 수술을 받아야 할 때 등 여러 상황에서 필요하다. 이 때문에 대형 동물병원이나 민간 동물 혈액 업체에서는 혈액을 공급하는 공혈견을 키운다. 몸무게 25~30㎏ 이상이 되는 대형견 가운데 일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공혈견의 존재는 사실 ‘불편한 진실’이다. 공혈견이 없으면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평생 피를 뽑아 다른 개에게 주는 공혈견의 운명은 가혹하기만 하다. 더욱이 2015년에는 민간업체의 공혈견이 뜬장에 살면서 남은 음식물을 먹는 것이 알려진 뒤 동물 학대 논란도 불거졌다. ‘필요악’인 공혈견을 대신하기 위해 헌혈로 수혈할 피를 모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계속돼 왔다.
한국헌혈견협회에서는 헌혈한 강아지에게 노란 스카프를 해준다. 보통 외국에서는 헌혈견에게 빨간색 스카프를 해준다. 한국헌혈견협회 문의 031-535-5572.
그러한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아픈 개에게 건강한 혈액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공혈견을 줄여가기 위한 자발적인 헌혈 모임인 ‘한국헌혈견협회’가 28일 창단했다.
공혈견 대신 헌혈견
“공혈견이 불쌍하다고 이야기는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걸로 끝이더라고요. 정말로 (공혈견 문제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헌혈견을 모으는 캠페인을 하기로 했어요.”
2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강부성 한국헌혈견협회 대표는 자신이 만드는 반려동물 팟캐스트 ‘개소리’에서 공혈견 문제를 처음 알게 됐다. 이후 지난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헌혈견 모집에 나섰다. 1년 2개월 동안 팟캐스트를 통해 홍보한 결과 35마리의 헌혈견이 탄생했다. 사료 회사, 반려견 옷 제조 회사, 나무공예가, 반려견 택시업체 등 헌혈견 캠페인에 동참하는 이들도 협회를 후원하고 있다.
지난 3월 헌혈 중인 로빈. 처음 헌혈하러 갔을 때는 흥분해 채혈에 실패했다. 병원에서는 개가 흥분했거나 피가 잘 나오지 않을 때, 건강검진 결과 이상이 발견되면 채혈하지 않는다. 강부성
강 대표가 헌혈견 캠페인에 나선 건 반려견 로빈(래브라도 리트리버 수컷·3살)을 키우고 있어서다. 로빈이 있어 다른 대형견 보호자들을 많이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캠페인을 확장해 갈 수 있었다. 1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헌혈견 캠페인을 응원하고 지지한 시민은 약 600명이다. 28일 창단한 협회(
www.한국헌혈견협회.kr)에는 헌혈견, 헌혈을 할 수 있는 대형견, 헌혈을 할 수 없는 소형견 등 반려견이 있는 시민이면 누구나 회원 가입이 가능하다.
로빈 역시 스무번째 헌혈견이다. 이날 함께 나들이 나온 로빈은 헌혈견만 할 수 있는 노란색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스카프에는 고맙다는 뜻의 영어 ‘Thank Donors’가 쓰여 있었다.(영국의 ‘동물혈액은행’이나 서울대 동물병원에서는 헌혈견의 상징으로 빨간색 스카프를 사용한다.)
헌혈은 헌혈하는 개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도 헌혈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일단 헌혈하려면 병원에서 무료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헌혈한 뒤에는 적혈구 생산을 자극해 피를 더 많이 만들어낸다.
보통 다리의 혈관에서 채혈한다고 한다. 강부성
협회를 통해 피를 받는 서울 중랑구 로얄동물메디컬센터 김영환 원장은 “헌혈견은 공혈견보다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니 혈액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피는 계속 만들어진다. 사람도 헌혈하는 게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듯 강아지도 헌혈하면 대사가 활성화한다”고 설명했다.
헌혈견 캠페인은 대형견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소형견이 절대적으로 많은 한국 반려문화에서 대형견은 반려견이 없는 시민이나 소형견을 키우는 반려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더욱이 물림 사고나 짖음 등 반려견으로 인한 사회 갈등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면서 대형견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헌혈은 대형견만 할 수 있다.
한국헌혈견협회 강부성 대표(오른쪽)와 헌혈견 로빈(오른쪽 둘째), 남편 윤성희 씨와 반려견 챨스가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이동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활동하는 리트리버는 그래도 이미지가 좋은 편이에요. 그런데 진돗개, 로트와일러, 카네 코르소 같은 외모의 대형견은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런 개들도 헌혈견이 될 수 있어요. 대형견이 헌혈견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 대형견의 이미지도 좋아질 거에요.” 강 대표가 말했다.
협회의 목표는 헌혈만으로 수혈이 이뤄지도록, 더 많은 개가 헌혈할 수 있는 날을 앞당기는 것이다. 현재 협회와 협업하고 있는 동물병원은 서울 중랑구의 한 곳인데, 일산, 인천, 청주 등 회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편하게 헌혈할 수 있는 동물병원이 생기기를 바란다. 또 헌혈견지원센터 등 헌혈하고 싶은 반려견 누구나 올 수 있는 병원이 마련되는 날을 기다린다.
“물론 피를 뽑을 때는 바늘이 들어가기 때문에 개도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검사한 뒤 건강한 개만 헌혈을 할 수 있어요. 헌혈하러 왔다가 피가 잘 나오지 않아서 돌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1년에 한번 1시간 동안 헌혈하는 건 동물 학대가 아니에요. 만약 대형견 보호자라면, 우리 개가 아파 수혈해야 할 때를 생각하고 헌혈에 나서주세요.” 강 대표는 노란 스카프의 영웅이 늘어나 가까운 미래에 공혈견이 사라지길 소망한다.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한겨레신문사 옥상 헌혈견 로빈.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형견 이미지 개선도
헌혈할 수 있는 개의 조건은 △몸무게 30㎏ 이상 △2살 이상 8살 이하 △심장사상충 예방과 구충 등 정기적인 예방접종을 한 건강한 반려견이다. 보통 한번 헌혈을 하고 3개월이 지나면 다시 헌혈할 수 있지만, 협회에서는 처음에는 1년에 한번 헌혈할 것을 권한다. 보통 다리의 혈관에서 300~350㎖(약 10㎖/㎏)를 채혈한다. 개의 혈액형은 13~15가지이다. 다만 대부분의 개는 처음 수혈할 때에는 모든 종류의 혈액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의 O형에 해당하는 ‘유니버설 도너’(모두에게 줄 수 있지만 받을 때는 같은 혈액형만 가능)는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