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참배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10일 광주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이날 오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국립5·18민주묘지(5·18묘지)를 찾으면서 윤 후보 일행과 광주시민들, 경찰, 취재진이 뒤엉켜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대선후보가 전국 각지를 돌며 유권자를 만나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왜 이런 소란이 일어나야 했는지, 윤 후보를 바라보는 광주시민들의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안전사고 우려 전달했지만 참배 강행
윤 후보가 광주를 찾은 이유는
‘전두환 옹호 발언’에 이은
‘개 사과 사진’으로 싸늘하게 식은 호남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인 스스로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광주를 찾아 사과하겠다고 밝혔고, 실제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첫 지방 행보로 광주를 찾은 것이죠.
윤 후보는 이날 오후 4시가 넘어 5·18묘지에 도착했지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광주시민들은 오전 10시부터 5·18묘지에 모여 윤 후보 규탄에 나섰습니다. ‘5·18민주화운동 헌법전문에 포함’, ‘김진태 전 의원 등 5·18을 헐뜯은 당내 인사 청산’ 등 사죄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기 전까지 참배를 막겠다는 뜻이었습니다.
5·18묘지는 입구인 ‘민주의 문’을 지나 민주광장, 추념문, 참배광장을 거쳐 추모탑 앞 참배단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도록 동선이 짜여 있습니다. 민주의 문에서 참배단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00m입니다. 오후 4시17분께 현장에 도착한 윤 후보는 사복 차림의 경찰 100여명이 두줄로 서서 통로를 확보해 민주의 문을 거쳐 참배단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5분에 걸쳐 160여m를 이동한 윤 후보 일행은 참배단을 40m 앞두고 멈춰야 했습니다. 5·18단체, 시민단체, 대학생단체 회원 등 50여명이 ‘가짜 사과 필요 없다’ ‘광주를 더럽히지 말라’라고 써진 손팻말을 들고 저지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들 뒤에는 길이 8m 펼침막 4개가 차례로 세워져 있었고, 참배단 앞에는 5·18 당시 자녀를 잃은 70∼80대 오월어머니회 회원 20여명도 앉아 있었습니다.
참배길이 저지당하자 윤 후보 쪽도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경호원, 지지자들이 앞을 막아선 시민들을 밀쳐내기 시작한 겁니다. 시민들도 지지 않고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양쪽에서 고성이 오갔고, 중간에 낀 여자 대학생의 “밀지 마세요”라는 외침은 고함 속에서 곧 묻혔습니다. 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0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묵념하고 있다. 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0m쯤 밖에서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윤 후보는 결국 그 자리에 묵념 뒤 입장문을 읽고 묘지를 빠져나갔습니다. 다행히 다치거나 입건된 사람은 없었지만, 광주시민들의 마음은 다시 한번 헤집어져야 했습니다.
사실 이날 충돌은 윤 캠프에서도 예견하고 있습니다. 오전부터 오월어머니회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추념문과 참배단 앞을 점유하자 묘지관리소 쪽은 윤 후보와 동행한 호남 출신 정운천 국민의힘 의원에게 사진을 보내 상황을 알립니다. 참배를 강행하면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는 의견도 전달했습니다. 정 의원은 윤 후보에 앞서 묘지에 도착해 상황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윤 후보는 참배를 강행했고, 캠프 쪽과 시민들은 몸싸움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광주시민을 만나러 온 것이냐, 무릎 꿇고 참배하려는 사진을 찍기 위해 온 것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10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참배를 저지하기 위해 참배단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년 전 황교안 방문 때와 판박이?
이날 상황을 지켜본 김영훈 5·18유족회 회장은 “
2019년 39주년 5·18기념식 때 황교안 전 대표의 방문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2019년 2월 국민의힘(당시 자유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전 의원은 국회에서
‘5·18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를 열어 “5·18은 북한군이 일으킨 폭동”,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 등의 망언으로 물의를 빚었습니다. 국민의힘은
김진태 의원에게 ‘경고’, 김순례 의원에게 ‘당원권 정지 3개월' 등 솜방망이 처벌을 합니다. 이종명 전 의원에게는 최고수준인 ‘제명’ 처분을 내렸지만, 이는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으로 이적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5·18유공자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고, 이 때 황교안 전 대표는 5·18묘지에서 열린 39주년 5·18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예고합니다.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일부러 돌 맞으러 오냐’는 비아냥이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돌을 던지는 시민은 없었지만 황 전 대표는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에 둘러싸여 10여분간 곤욕을 치렀습니다.
2019년 5·18기념식을 기억하는 광주시민들은 이번 윤 후보의 5·18묘지 방문 때 물리적 충돌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펼침막과 손팻말 이외에 혹시라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물품은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시민은 ‘욕하지 맙시다. 계란을 던지지 맙시다. 자작극에 말려들지 맙시다’라고 써진 팻말을 들고 현장을 찾기도 했습니다. 자칫 과격한 반대활동은 ‘달’(윤 후보 언행)이 아니라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광주시민의 행동)에 여론을 집중시키고, 이는 윤 후보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일 오전 전남 목포시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 앞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목포 방문을 반대하는 목포지역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윤 후보 지지자들이 찬반 주장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5·18 3단체(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와 5·18기념재단도 이번 윤 후보의 방문을 무조건 반대한 게 아닙니다. “5·18묘지 참배는 개인 자유의지다. 다만 전두환 옹호 발언에 대한 구체적인 사과부터 해라”는 성명을 냈습니다. 구속부상자회는 10일 윤 후보가 옛 상무대 영창이었던 5·18자유공원을 방문했을 때 안내와 설명을 맡기도 했습니다. 윤 후보의 캠프에도 일부 5·18유공자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과 노력은 의미…소통능력 부재는 아쉬움”
윤 후보는 5·18묘지를 떠나면서 기자들과 만나 “제 발언으로 상처받은 모든 분들에게 사과드렸다. 오늘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처받은 국민, 광주시민 여러분께 이 마음을 계속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번 광주 방문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나 봅니다.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11일 방문한 전남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에 관한 게시글은 올렸지만, 전날 광주 일정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5·18 3단체와 5·18기념재단은 윤 후보 방문 직후 낸 성명에서 “지극히 일방적인 사과에 대해 실망스럽다”면서도 “사과의 마음이 어떻게 공약과 정책으로 구체화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말의 기대감까지 접은 것은 아니란 뉘앙스입니다.
광주시민들이 처음부터 윤 후보를 멀리한 것은 아닙니다. 윤 후보는 2003∼2005년 광주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하며 광주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10월 2주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광주·전라지역에서 이재명 후보 54.4%, 윤석열 13.4%, 11월 2주차는 이재명 64.7%, 윤석열 19.6%의 지지율을 보였습니다. 2017년 19대 대선 때 광주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1.6%를 득표한 것에 견줘, 결코 낮은 지지율이 아닙니다. 윤 후보가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뒤 지난 7월17일 5·18묘지를 참배했을 때도 반발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일방적인 방문은 더욱 아쉬움을 남깁니다.
“윤 후보가 사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광주를 방문하기 전 명확하게 사과 의지를 표명해 5·18 희생자와 가족의 마음이 풀어지면 그때 방문해도 늦지 않았다. 이번 방문으로 더욱 깊어진 감정의 골은 단시간에 풀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의 이번 광주 방문은 권위주의적·일방적인 성격, 소통능력 부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선거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지병근 조선대학교 교수(정치외교학)의 진단입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7월17일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