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고 한승헌 변호사 유족들이 안장식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대학생 때 그림 때문에 구속이 되니 얼마나 막막합니까. 그때 한승헌 변호사님이 도움을 주셨죠.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기 우리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셨던 분입니다.”
25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2묘역(1-148)에 영면하는 고 한승헌(1934~2022) 변호사 안장식을 바라본 이상호(62) 작가의 말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이 작가는 1987년 조선대 4학년 때 동갑내기 친구 전정호 작가와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했다가 공안당국이 작품 속 인물들이 미국 성조기를 찢는 모습을 문제 삼는 바람에 미술인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한 변호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이는 이 작가만이 아니었다.
김용채(72) 변호사는 추도사에서 “고인은 민주주의가 압살되고 인권과 정의가 억압받던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민주 대열의 최전선을 지키셨다. 이제 우리가 인권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다. 걱정 마시고 영면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안장식에 참석한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참여자들도 저마다 “한 변호사는 해학과 근엄함을 동시에 지닌 선비였다”고 회상했다. 추도사, 추모시를 마지막으로 고인은 땅에 묻히며 세상과 작별했다. 유족은 흙을 뿌리며 오열했다.
‘산민 한승헌 변호사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장례 마지막 날을 맞아 한 변호사 고향 등을 들러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아침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발인식에는 1989년 방북으로 재판을 받았던 임수경 전 의원,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받다 분신을 시도했던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등이 찾아 고인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25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고 한승헌 변호사의 유족들이 무덤 위에 꽃을 바치며 안식을 기원하고 있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오후 2시 모교인 전북 전주 전북대학교 노제에서는 고향 지인들의 배웅이 이어졌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은 “당신의 모자랄 것 없는 한 생애가 모두 우리였다. 역사였고, 혁명이었으며, 실패였고, 좌절이었고, 희망이었으며, 용기였고, 완수였다. 흙바람 이는 3월이었고, 4월의 바람이었으며, 5월의 아침이었고, 6월의 거리였으며, 촛불을 든 해가 질 무렵이었고, 시를 쓰는 나무들의 노을이었으며, 그리고 사랑이었으며, 당신이기도 한 저 일련의 봄 햇살들을 아직도 우린 어찌하지 못한다”고 추모시를 낭독했다. 유기상 전북 고창군수는 이날 “고인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으셨다. 1990년대 초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담당 공무원으로 고인을 알게 됐는데, 언제나 기품을 지닌 모습이셨다”고 회고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장을 역임한 송만규 화가는 “후배 미술인들을 무료로 변론하시면서도 겸양을 잃지 않으셨다”고 기억했다.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난 한 변호사는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1965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폐해를 보고 스스로 검사 옷을 벗었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던 그는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호하는 한편, 1988년 5월 <한겨레> 창간위원장, 같은 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발족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벌였다. 1975년에는 반공법 위반,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돼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김용희 박임근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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