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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하나님은 내게 감사원장 시켜 밤낮 감사하도록”…추모객에 남긴 ‘웃음’

등록 2022-04-24 19:04수정 2022-04-25 09:24

[한승헌 변호사 추도식] 25일 발인
고 한승헌 변호사 추도식이 24일 오후 서울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한 변호사의 모습이 담긴 추모영상을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고 한승헌 변호사 추도식이 24일 오후 서울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한 변호사의 모습이 담긴 추모영상을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

24일 서울 서초구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1세대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변호사의 빈소 옆에 놓인 동판에 한 변호사의 발 모양과 함께 각인된 그의 좌우명이다. 이날 오전 동판 앞을 지나가던 장례식장 직원들은 잠시 멈춰서 좌우명을 찬찬히 읽더니 “새겨둬야겠다”며 이를 휴대전화로 찍었다.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군사정권 시절 양심수와 시국사범 등을 변호한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식 넷째날인 이날도 정치권과 법조계, 시민사회계 등에서 고인을 기리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지난 20일, 향년 88살로 별세한 한 변호사에 대해 ‘늘 올곧았으며 겉은 강인하지만 속은 따뜻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이날 빈소를 찾은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은 “평화민주당 때부터 당이 힘들었을 때마다 많은 조언을 구하던 분이었다. 우리나라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을 다 해오신 분”이라고 말했다.

한 변호사를 따르던 이들이 그의 호인 ‘산민’을 따서 만든 사모임 ‘산민회’ 회원 20여명은 나흘 내내 한 변호사의 장례식장을 지켰다. 산민회 회원이자 한 변호사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김희수 경기도 감사관은 “범죄자 취급받았던 억울한 피고인들을 변론하면서 본인이 피고인처럼 괴로워하던 사람,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사람이 바로 인간 한승헌이었다. 이 시대의 어른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 빈소 옆에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 설치해 놓았던 한승헌 변호사 관련 동판과 안내글이 적힌 조형물을 가져다 놓아 조문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 빈소 옆에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 설치해 놓았던 한승헌 변호사 관련 동판과 안내글이 적힌 조형물을 가져다 놓아 조문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각계 시민사회단체들이 구성한 ‘산민 한승헌 변호사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후 5시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식이 열린 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은 100명이 넘는 추모객으로 가득 찼고 미처 입장하지 못한 이들은 접객실에서 중계 영상을 보기도 했다. 상임 장례위원장을 맡은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김선수 대법관, 김준태 시인, 김영주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상임이사, 명진 스님 등이 추모사를 낭독했다. “하늘 끝까지 저 하늘 끝까지 나는 말 없이 나의 길을 가련다. 하늘 높이 깃발 날리며 사나운 이 길을 가야겠다….” 소리꾼 장사익(73)씨는 지난해 코로나로 열지 못한 고인의 미수(88살) 잔치를 준비하며 고인의 시로 만든 노래를 조가로 대신 불렀다.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던 변호사’, ‘저작권법 전문가’, ‘꼼꼼한 기록가’ 등 고인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했지만, 추모객들은 무엇보다 엄혹한 시절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로 기억했다. 김선수 대법관은 “어느 자리에서나 변호사님이 계신 곳이라면 으레 웃음이 넘쳐났다. 뜻밖의 유머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웃게 하셨기 때문”이라며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법률가로서 삶의 자세를 세우는데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김영주 상임이사는 ‘신앙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감사원장을 시켜 밤낮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고인의 유머를 소개하며 “경직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변호사님은 유머로 우리를 유쾌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추모 영상 도중 고인의 유머를 담은 육성이 흘러나오자 곳곳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인의 유족은 용기 있고 강단 있는 고인에게도 고민과 갈등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1975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뒤 8년 만에 복권된 직후에도 고인은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 리영희 선생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것을 보자 “저 사건을 내가 변론하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는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고인의 차남 한규무 광주대 교수는 “아버님은 용기 있고 힘든 투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차마’라는 표현을 썼다. 안타깝고 애틋한 사연을 가진 사람을 ‘차마’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라고 했다.

발인은 25일 아침 6시50분이고, 노제는 25일 오후 2시 전북대학교에서 열린다. 장지는 광주 5·18민주묘지, 화장장은 양재 서울추모공원이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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