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지> (전 10권)
베스트셀러 들여다보기 / <삼한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은 종래의 사극에선 보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전쟁터의 이념 공작이다. 집에서 농사나 짓고 있어야 할 남정네들이 끌려나와 싸움터에 서게 됐으니, 그들의 전투의욕을 고취하려면 먼저 그들에게 목숨 걸고 적군을 무찌르지 않으면 안 될 그럴 듯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적군을 화해할 수 없는 원수로 만들어 우리 편의 결속력을 강화는 작업인데, 그 이데올로기 공작을 능숙하게 벌이는 사람이 신라군 장수 김유신이다. 역사소설가 김정산씨가 쓴 <삼한지>(전 10권)에서도 김유신은 노회한 전략가로 그려진다.
“유신은 백제 조정에서 몇 가지 사실들을 취해 부허지설로써 사비 왕실과 백성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자 결심했다. 사실에 근거한 소문의 위력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갈수록 커진다는 점을 이용한 위계였다. 이때 김유신이 만들어낸 소문이 바로 ‘1천 궁녀설’이다. 1천 궁녀란 소리는 터무니없는 숫자였으나 입에서 입을 거치며 1천 궁녀는 금방 2천 궁녀가 되고, 2천 궁녀는 또다시 3천 궁녀가 되었다. 임금 한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리고 산다는 거였다. 곰곰 생각해보면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 본래 소문이란 거북이의 털도, 처녀 불알도 근거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내는 법이다.”
인용된 문장에서도 얼핏 엿보이듯이 <삼한지>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술술 풀리는 입담이 독자를 빨이들이는 역사소설이다. 2003년 당시 랜덤하우스중앙에서 출간됐으나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이 소설은 지난해 3월 예담 출판사로 옮겨 개정판으로 나온 뒤 1년 만에 30만 부(3만 질)나 팔렸다. 김현종 예담 출판사 홍보팀장은 “초판이 나오고 석 달 만에 10만 부 가량이 팔린 뒤 꾸준한 속도로 독자가 찾고 있다”며 “보통 여러 권으로 된 책은 1권과 나머지 권 사이의 판매량이 크게 차이 나는 법인데, <삼한지>는 1권부터 10권까지 거의 판매량이 같다”고 말했다. 독자가 한 번 손에 잡으면 마지막까지 읽어야 책을 놓을 만큼 흡인력이 있다는 얘기다.
<삼한지>는 말하자면, 한국판 <삼국지>다. <삼국지>가 후한이 망한 뒤 성립한 3세기 위·촉·오 삼국의 영웅호걸 이야기이듯이, <삼한지>는 이른바 ‘삼국통일’을 앞둔 7세기 고구려·백제·신라가 역사적 배경이다. 유비, 관우, 장비 대신에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백제의 무왕과 성충, 신라의 무열왕과 김유신이 등장해 서로 각축하고 용맹과 지혜를 겨룬다. <삼국지>가 단순히 역사소설로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일종의 자기계발서·경제경영서로 읽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한지>도 경제경영서·자기계발서 구실을 한다. 김현종 홍보팀장은 “재계·관계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이 책을 많이 사보았다”며 “<삼한지> 마니아인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1천 질을 구입해 정·재계 인사들에게 돌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삼한지>의 등장인물들이 기업 경영자나 조직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리더십 모델 노릇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강경태 한국시이오연구소 소장은 ‘<삼한지>에서 배우는 7가지 리더십’이라는 보고서를 내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고서는 각 인물들의 7가지 유형으로 을지문덕-전략가형 리더, 연개소문-권위형 리더, 무왕-실행형 리더, 김유신-서번트형 리더, 문무왕-외유내강형 리더를 꼽았다. 역사소설도 실용서 기능을 해야 인기가 있다는 걸 이 책은 새삼 입증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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