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가 유포한 반유대주의도 서구가 만들어온 편견의 되풀이
도덕적 잣대로 이스라엘 비난할수록 폭력과 미움의 불씨만 커지는 딜레마
아랍도 자기중심적 틀 버려야 공생 가능
도덕적 잣대로 이스라엘 비난할수록 폭력과 미움의 불씨만 커지는 딜레마
아랍도 자기중심적 틀 버려야 공생 가능
안과 밖
연민의 전지구화
얼마 전까지도 TV를 통해 연일 전해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상황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균형을 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과시가 결국은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고, 유대인에게 행해지는 지구 곳곳에서의 테러를 추인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마저도 작금의 사태를 보며, 자신들의 친 이스라엘적 사고가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반유대주의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전 지구촌이 이스라엘의 폭격과 폐허가 된 레바논 시가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약자에 대한 연민을 공감하게 됨은 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현상이다. 레바논에서의 전쟁 보도를 전하는 서방언론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갈린다. 유대인학살에 대한 유럽의 공동책임을 강조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이스라엘의 독립국가로서의 방어행위를 이해하고 두둔해야 한다는 입장이 하나라면, 이스라엘이 군사행위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다른 하나다. 이는 매체가 견지하는 좌우 성향에 따라 확연히 갈라지는 사항이기도 한데, 보수적 신문들이 전쟁의 전략분석과 이들 뒤의 미국이나 이란의 손익계산 분석에 열심인 반면,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들은 전쟁 자체의 정당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논의를 집중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좌파가 약자의 편에서 서서 이스라엘을 가해자로 보며, 반미적 전통을 유지하는 입장이라면, 우파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적들에 둘러싸인 약자로 보면서, 서구가 역사적 죄책감에서라도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 이스라엘 정권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난한다고 자동적으로 반유대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모두 이스라엘인인 것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이 취하는 정책에 대한 반대와 유대인이라는 종족 자체에 대한 부정은 구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같은 중동의 바그다드에서는 거의 매일 수십 명씩의 모슬렘이 다른 모슬렘 교도의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체첸에서는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약 만여명의 모슬렘 어린이들이 죽어갔어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도, 아랍권의 대책회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모슬렘이라도 이스라엘 군에게 죽임을 당한 모슬렘만 분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왜 세계는 이스라엘의 공격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반유대주의의 탄생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점령지 이주정책에서 늘 타협없는 모습을 보여 왔으며, 점령지역에서의 반인권적 행위를 통하여 지역상황을 더 첨예화시켜 왔다. “역사상 인종차별주의의 가장 잔인한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그들을 괴롭혔던 사람들로부터 그 방법을 배웠음에 틀림없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정당한 비판까지도 ‘반유대주의’로 몰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악용해왔다. 만일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난하는 모든 이들을 반유대주의자, 즉 인종차별주의자로 부른다면,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는 부시나 대다수의 미국인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자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빠지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비난할 수는 없는가? 유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표현인 반유대주의는 서구에서 2천년이 넘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따라붙는 선입견도 다양하여, 메시아를 부정하는, 신을 살해한, 인색한, 금발의 여성을 좋아하는, 기생충 같은, 세계 지배의 음모를 가진, 등등의 형용사들로 채워져 왔다. 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을 특징짓는 이러한 표현들은 실제 유대인들의 삶이나 존재방식과는 상관없는 편견에 불과한 것들임이 분명하지만, 서구인들은 이런 자신들이 만들어낸 틀에 맞지 않는 유대인들을 단지 변종 정도로만 생각하여왔다. 얼마나 간편한 생각인가. 고대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신교를 숭상했던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고집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미 예수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주변 국가들의 억압의 대상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후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 신을 부정한 족속으로 비난받았으며, 사회가 위기에 처하거나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의 재난 앞에서 유대인들은 어김없이 집단학살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들이 악마로 변신하여 재앙을 불러일으켰다거나, 동네 우물에 독을 타 넣었으며, 심지어 어린이들을 산채로 죽여 종교적 재물로 썼다는 누명을 써야 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은 불태워져야 하며, 불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먼지로 뒤덮여 타다 남은 찌꺼기와 돌맹이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행해져야 한다”고 썼다. 그것은 1938년 11월 독일 전역에서 일제히 벌어진 유대인 회당에 대한 방화사건을 이미 400년 전 교사한 것이지만, 아직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에 기반 한 것은 아니었다.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은 우생학을 통하여 이론적 기반이 성립된 19세기에 시작되었으며, 20세기 나치의 집권과 함께 독일에서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반유대주의가 국가 이데올로기로까지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 대한 전통적 편견이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반유대주의는 공식적 자리에서는 사라진다. 역설적이게도 대학살이라는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던 독립국가 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국가 건립에 필요한 땅을 획득하게 된 셈이다. 민족주의 운동 간의 충돌
이미 유엔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로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시온주의 자체는 타 민족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겨난 이념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와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생겨났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충돌이 민족주의적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양 세력은 점차 상대방 인종의 존립권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이 유대국가의 건설이야말로 유대인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임을 주장하며, 장기적으로는 유럽을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해야 한다고 제안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그의 제안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꿈처럼 보였으나, 1930년대 유럽에서의 학대를 피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대국가의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저항이 시온주의 운동과 부딪히면서 아랍세계에 의한 반유대주의도 확산되기 시작한다. 즉 아랍인들의 반유대주의는 채 한 세기도 안 된 새로운 현상이지만, 이후 아랍세계가 갖게 되는 유대인에 대한 시각은 지난 2천년 동안 서구사회가 만들고 유지시켜온 바로 그 편견의 되풀이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 세계의 반유대주의는 서구로부터 수입해 온 이념, 즉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유대인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유럽의 극우세력과 아랍의 반유대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손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욕망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테러에 의해 피자집이나 길모퉁이 카페에 앉아 있다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부녀자들을 보며, 비록 용서하기는 힘들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은 비단 우리에게도 이봉창이나 안중근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죄없는 시민들을 죽여서라도 점령에 대항하려는 팔레스타인인의 자살테러를 “선한” 테러로 부르기 힘들듯이, 테러리스트들의 은거지를 섬멸한다는 명분하에 가하는 이스라엘의 무차별 살상 또한 “악한” 테러로만 보기도 어렵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비난할 때 도덕적 정당성에 집착하면 할수록 폭력과 미움의 쳇바퀴는 더해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북한에 대하여 인권문제와 낮은 민주화 정도를 비난하면 할수록 그들에 대한 이해와 화해의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과도 같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편에 대한 이해와 옹호만으로는 분쟁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이 시온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야만 비로소 이성적이고 동반자적 차원에서 중동의 평화문제를 논할 기반이 성립된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논리로 아랍세계가 이슬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중동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자신들의 존립근거로 하고 있으며,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마스는 정치적 권력과 국가 영토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민족주의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실은 설 자리가 없다. 출신지역에 관한 뿌리깊은 선입관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반유대주의적 그것에 버금가랴. 우리의 지역편견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행해진 정치가들의 끊임없는 조작과 선동의 결과였다. 비이성적 선동의 뒤에는 늘 이성적 계산이 숨어 있었으며, 그 결과 국민들은 알면서도, 혹은 저도 모르는 사이 지배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편견과 선동에 별 반성없이 젖어들어 갔다.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논의가, “그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종류의 피폐함을 경험하면서도 끝내는 불만족으로 남겨지는, 일종의 정치적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라는 경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하다.
이진일/성균관대 연구교수
얼마 전까지도 TV를 통해 연일 전해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상황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균형을 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과시가 결국은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고, 유대인에게 행해지는 지구 곳곳에서의 테러를 추인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마저도 작금의 사태를 보며, 자신들의 친 이스라엘적 사고가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반유대주의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전 지구촌이 이스라엘의 폭격과 폐허가 된 레바논 시가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약자에 대한 연민을 공감하게 됨은 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현상이다. 레바논에서의 전쟁 보도를 전하는 서방언론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갈린다. 유대인학살에 대한 유럽의 공동책임을 강조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이스라엘의 독립국가로서의 방어행위를 이해하고 두둔해야 한다는 입장이 하나라면, 이스라엘이 군사행위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다른 하나다. 이는 매체가 견지하는 좌우 성향에 따라 확연히 갈라지는 사항이기도 한데, 보수적 신문들이 전쟁의 전략분석과 이들 뒤의 미국이나 이란의 손익계산 분석에 열심인 반면,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들은 전쟁 자체의 정당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논의를 집중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좌파가 약자의 편에서 서서 이스라엘을 가해자로 보며, 반미적 전통을 유지하는 입장이라면, 우파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적들에 둘러싸인 약자로 보면서, 서구가 역사적 죄책감에서라도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 이스라엘 정권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난한다고 자동적으로 반유대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모두 이스라엘인인 것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이 취하는 정책에 대한 반대와 유대인이라는 종족 자체에 대한 부정은 구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같은 중동의 바그다드에서는 거의 매일 수십 명씩의 모슬렘이 다른 모슬렘 교도의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체첸에서는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약 만여명의 모슬렘 어린이들이 죽어갔어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도, 아랍권의 대책회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모슬렘이라도 이스라엘 군에게 죽임을 당한 모슬렘만 분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왜 세계는 이스라엘의 공격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반유대주의의 탄생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점령지 이주정책에서 늘 타협없는 모습을 보여 왔으며, 점령지역에서의 반인권적 행위를 통하여 지역상황을 더 첨예화시켜 왔다. “역사상 인종차별주의의 가장 잔인한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그들을 괴롭혔던 사람들로부터 그 방법을 배웠음에 틀림없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정당한 비판까지도 ‘반유대주의’로 몰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악용해왔다. 만일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난하는 모든 이들을 반유대주의자, 즉 인종차별주의자로 부른다면,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는 부시나 대다수의 미국인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자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빠지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비난할 수는 없는가? 유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표현인 반유대주의는 서구에서 2천년이 넘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따라붙는 선입견도 다양하여, 메시아를 부정하는, 신을 살해한, 인색한, 금발의 여성을 좋아하는, 기생충 같은, 세계 지배의 음모를 가진, 등등의 형용사들로 채워져 왔다. 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을 특징짓는 이러한 표현들은 실제 유대인들의 삶이나 존재방식과는 상관없는 편견에 불과한 것들임이 분명하지만, 서구인들은 이런 자신들이 만들어낸 틀에 맞지 않는 유대인들을 단지 변종 정도로만 생각하여왔다. 얼마나 간편한 생각인가. 고대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신교를 숭상했던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고집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미 예수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주변 국가들의 억압의 대상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후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 신을 부정한 족속으로 비난받았으며, 사회가 위기에 처하거나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의 재난 앞에서 유대인들은 어김없이 집단학살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들이 악마로 변신하여 재앙을 불러일으켰다거나, 동네 우물에 독을 타 넣었으며, 심지어 어린이들을 산채로 죽여 종교적 재물로 썼다는 누명을 써야 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은 불태워져야 하며, 불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먼지로 뒤덮여 타다 남은 찌꺼기와 돌맹이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행해져야 한다”고 썼다. 그것은 1938년 11월 독일 전역에서 일제히 벌어진 유대인 회당에 대한 방화사건을 이미 400년 전 교사한 것이지만, 아직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에 기반 한 것은 아니었다.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은 우생학을 통하여 이론적 기반이 성립된 19세기에 시작되었으며, 20세기 나치의 집권과 함께 독일에서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반유대주의가 국가 이데올로기로까지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 대한 전통적 편견이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반유대주의는 공식적 자리에서는 사라진다. 역설적이게도 대학살이라는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던 독립국가 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국가 건립에 필요한 땅을 획득하게 된 셈이다. 민족주의 운동 간의 충돌
이미 유엔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로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시온주의 자체는 타 민족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겨난 이념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와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생겨났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충돌이 민족주의적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양 세력은 점차 상대방 인종의 존립권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이 유대국가의 건설이야말로 유대인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임을 주장하며, 장기적으로는 유럽을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해야 한다고 제안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그의 제안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꿈처럼 보였으나, 1930년대 유럽에서의 학대를 피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대국가의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저항이 시온주의 운동과 부딪히면서 아랍세계에 의한 반유대주의도 확산되기 시작한다. 즉 아랍인들의 반유대주의는 채 한 세기도 안 된 새로운 현상이지만, 이후 아랍세계가 갖게 되는 유대인에 대한 시각은 지난 2천년 동안 서구사회가 만들고 유지시켜온 바로 그 편견의 되풀이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 세계의 반유대주의는 서구로부터 수입해 온 이념, 즉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유대인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유럽의 극우세력과 아랍의 반유대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손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욕망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테러에 의해 피자집이나 길모퉁이 카페에 앉아 있다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부녀자들을 보며, 비록 용서하기는 힘들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은 비단 우리에게도 이봉창이나 안중근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죄없는 시민들을 죽여서라도 점령에 대항하려는 팔레스타인인의 자살테러를 “선한” 테러로 부르기 힘들듯이, 테러리스트들의 은거지를 섬멸한다는 명분하에 가하는 이스라엘의 무차별 살상 또한 “악한” 테러로만 보기도 어렵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비난할 때 도덕적 정당성에 집착하면 할수록 폭력과 미움의 쳇바퀴는 더해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북한에 대하여 인권문제와 낮은 민주화 정도를 비난하면 할수록 그들에 대한 이해와 화해의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과도 같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편에 대한 이해와 옹호만으로는 분쟁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이 시온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야만 비로소 이성적이고 동반자적 차원에서 중동의 평화문제를 논할 기반이 성립된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논리로 아랍세계가 이슬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중동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자신들의 존립근거로 하고 있으며,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마스는 정치적 권력과 국가 영토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민족주의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이진일/성균관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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