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20년전 독일 ‘역사가 논쟁’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체험한 과거의 기억들은 동일하지 않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맥아더 동상과 ‘해방 전후사’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어떤 기억이 그 사회의 공인된 역사로 기록되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이다. 기존의 역사해석을 수정하고 과거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늘 있어왔다. 또 그 과정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어떠한 정치적 함의도 없음이 종종 강조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과 그 해석을 둘러싼 학문적 성과를 모두 해체시키고, 논쟁이 가졌던 정치적 성격만 도드라지게 만든다. 광복 61년. 과거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방은 지금부터 20년 전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의 원인을 두고 벌인 ‘역사가 논쟁’을 떠오르게 한다.
유대인 학살은 정당방위?
1986년 6월, 서독의 대표적 보수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신문’(FAZ)에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는 “가버리려 하지 않는 과거”라는 글을 싣는다. 베를린 자유대학 현대사 교수였던 놀테는 자신의 기고문에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과 소련 볼쉐비키의 집단학살을 비교함으로써 양 사건이 갖는 내적인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짐짓 독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나치와 히틀러는 단지 자신들을 <아시아적> 행태의 잠재적이고도 실제적인 희생자로 여겼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태를 자행한 것이 아닐까? 수용소 군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았던가? 볼쉐비키의 계급학살이 나치의 인종학살보다 논리적으로든, 실재 상으로든 먼저 일어난 일 아니던가?” 라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독일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것도 아시아로부터 도입된 것임을 주장한다. 즉 독일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인종학살이라는 범죄를, 사실은 다른 민족들도 과거에 저질렀었고 또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사건임으로, 그처럼 전대미문의 불가해한 사건인양 호들갑떨 일 없다는 논지였다.
이러한 놀테의 도발에 대하여 자유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철학자 유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격렬히 비난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넘어, 홀로코스트라는 20세기 최대의 비극적 범죄를 독일의 역사와 전통 속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궁극적으로 독일 민주주의에 관한 해석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로 확대된다.
하버마스는 놀테와 그 주변의 역사가, 언론인들을 ‘신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독일 현대사 서술에서의 자기변호적 경향‘이라고 비판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는 나치 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이었으며, 독일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부활시키기 위한 우파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불붙은 싸움은 서독사회에서 ‘역사가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약 2년여에 걸쳐 격렬히 진행되었다. 1,000개가 넘는 글들이 신문과 잡지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으며, 논쟁은 학문적 울타리를 벗어나 지식인 일반과 독자들까지 합세하여 양 진영으로 갈라진 채 조금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놀테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일종의 정당방위로 해석했다. 즉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에는 러시아 혁명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히틀러가 볼쉐비즘을 모방한 것으로까지 이해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치즘을 볼쉐비즘에 대항한 응전으로 이해함으로써, 히틀러가 저지른 인종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놀테가 보기에 전후 나치즘을 테마로 전개된 독일 사회에서의 논의들은 독일인들을 도덕적 죄책감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만드는 좌파의 ‘집단적 사고라는 횡포’이며, 이러한 행태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서있는 곳을 파라!”
독일 ‘역사가 논쟁’을 불러일으킨 에른스트 놀테(왼쪽).놀테의 주장에 맞선 위르겐 하버마스(오른쪽).
그렇다면 독일의 민족적 정체성 형성과 아우슈비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나치 범죄에 대한 기억을 껴안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처음부터 일관되지도, 철저하지도 않았다. 전 후 민주주의 체제의 출범과 함께 히틀러를 국민적 기억으로부터 집단적으로 몰아내고자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68운동 이후 나치 범죄에 대한 고백은 독일국민의 자기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둥이 된다. 이 가운데 아우슈비츠는 독일국민에게 여전히 어떠한 역사화나 상대화도 허용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범죄의 표상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서구사회에는 ‘역사 작업장 운동(history workshop movement)’이 큰 흐름을 이루면서, “네가 서있는 곳을 파라!”라는 구호 아래, 지방마다 자기 고장의 역사를 일상 생활이라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파헤치는 연구가 진행된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나치즘하의 일상생활’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통령배 전국 청소년 역사연구 경연대회’에는 총 2만여 명의 독일 청소년들이 참가하였으며, 잊고 지내던 아버지 세대의 아픈 과거가 들쑤셔지면서, 갑자기 곳곳에서 이웃 간의 반목과 불화의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198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SPD)이 패배하고 콜(Kohl)의 기독민주당(CDU)이 집권하면서 사회적 분위기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1980년 처음으로 서비스분야 종사자들의 수가 생산업 종사자들의 수를 앞질렀으나, 정치는 이 같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콜은 1979년 집권한 영국의 대처식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스스로 역사학 박사였던 콜은 나치시대의 상흔으로부터 벗어나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역사의식을 제시하는 역사정책을 펴나감으로써 68운동이후 독일사회를 지배하던 좌파적 담론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베를린에 ‘독일 역사박물관’을 세우고(1987), 수도인 본에는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의 집’을 건립하기로 결정한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러한 시도들을 보수주의자들이 나치의 역사를 국민들의 기억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몰아내려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가운데 발표된 놀테의 글은 마치 화약고에 불씨를 던진 격이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역사가 논쟁’은 보수의 시대로의 전환기를 맞아 새롭게 역사를 해석해보고자 했던 보수적 지식인들과, 이에 대항하여 68운동이 이룩해 놓은 대의와 도덕적 명분을 지켜나가려던 자유주의자들 간의 한판 대결이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공방의 이면에는 누가 도덕적으로 더 높은 영역을 차지하는가라는 고도의 정치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사회주의간의 관련성을 주장했던 놀테의 문제제기 자체는 신선하였지만 아직 채 지나가지 않은 과거를 억지로 화석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자신이 다른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거듭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재인식’ 그룹 행보와 유사
논쟁의 결과 스탈린의 테러가 홀로코스트를 끌어냈다는 논리는 근거없음으로 판명났고, 이 후 놀테는 학문적으로 고립된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자신의 진의가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주장이 결코 나치의 잘못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남은 과제는 이제 84살이 된 그를 역사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 고집불통의 노인으로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제기했던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답하는 일일 것이다. 즉 지난 시대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적 체제들, 인종학살, 추방과 말살의 정책들을 전 지구적 관점에서, 그리고 20세기 전체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에게 파시즘,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지난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근대화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요구한다.
다양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자유로운 사회를 이뤄냈다는 의미에서 서구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철저히 근대주의자(modernist)들이었다. 놀테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똑같은 근대의 산물로 파악하였고, 근대 자체 속에 이미 그 속성상 전체주의적 동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탈민족과 탈근대주의를 표방하고있는 우리 사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그룹이나 ‘교과서 포럼’ 등도 이와 유사한 인식에 바탕하고 있다. 그들의 ‘21세기 한국인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록 거리와 시간은 달리하더라도 동서양 보수의 끝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재편되고 있는 이념적 대치의 전선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아니다. 물론 전통적인 전선 가름방식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숨기고 왜곡한다.
문제제기 자체는 정당하였더라도, 경험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주장은 결국 사변이고 공론에 불과했음을 ‘역사가 논쟁’은 보여준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러한 논쟁이 과거사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을 놓고 충돌했던 사회세력간의 다툼이었음이 분명해지지만, 수정을 가하려는 쪽은 왜 늘 자신들의 관심이 ‘어디까지나 우리 학계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것이고 어떤 정치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머리말) 애써 강조하는 것일까?
그런데 문득, 나온 지 20년도 더 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요즘 세상에 누가 찾아 읽는지 궁금해진다. 비교를 하려면 격이 맞는 대상을 갖고 하라. 이는 또한 ‘역사가 논쟁’이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이진이진일/튀빙겐대 역사학 박사, 성균관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