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철조망 속 황새울 벼들은 타들어만 가는데…

등록 2006-07-06 19:26수정 2006-07-07 14:47

미국 대륙을 통해 들여다 본 한반도의 오늘. 현장 미술가 박병수씨가 가로 3.7m, 세로 2.6m, 두께 5㎜의 철판에 제작해 대추리에 설치한 작품 <대추리 아메리카>. 박씨는 “대추리에서 농민과 학생 노동자 등이 경찰과 대치해 싸우고 있을 때 험프리스 기지안의 미군들이 망원경으로 이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불쾌했다”며 “우리 땅을 남에게 주기 위해 우리끼리 싸우는 ‘비극적 현실’에 가슴 아팠다”고 덧붙였다. 사진 최병수씨 제공
미국 대륙을 통해 들여다 본 한반도의 오늘. 현장 미술가 박병수씨가 가로 3.7m, 세로 2.6m, 두께 5㎜의 철판에 제작해 대추리에 설치한 작품 <대추리 아메리카>. 박씨는 “대추리에서 농민과 학생 노동자 등이 경찰과 대치해 싸우고 있을 때 험프리스 기지안의 미군들이 망원경으로 이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불쾌했다”며 “우리 땅을 남에게 주기 위해 우리끼리 싸우는 ‘비극적 현실’에 가슴 아팠다”고 덧붙였다. 사진 최병수씨 제공
대추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추리가 16강 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월드컵 경기는 아니잖아요”
이것은 평화와 생존의 문제 단 1명의 주민이 남더라도 걔속된다

안과 밖/대추리는 지금

가을이 풍요롭다는 미군기지 이전 확장 예정지인 경기 평택시 ‘대추리’는 고립된 ‘섬’이다. 지난 5월4일, 1만5천여명의 군부대와 경찰이 투입돼 대추분교를 강제 철거한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 이후 마을 앞 들판에는 29㎞에 걸쳐 철조망이 세워졌다.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1∼2차례씩 쫒겨난 농민들이 평생을 애면글면 간척해온 논 바닥에는 깊은 수로가 파였고 경찰은 마을 입구에서 바리케이트를 설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초여름 따가운 햇살 아래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는 논바닥이 마르고 벼가 타들어 간다. 대추리에서 타들어가는 게 어디 벼 뿐일까. 농민들에게 벼는 자식이고 농지는 생명이다. 이를 속수무책 지켜보는 농심 역시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다른 동네 논에서 벼가 푸르게 크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2일 대추리 노인정 앞에서 만난 농민 이수궐(70)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같은 철에는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논 일을 보는게 평생 일이었지만 더는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철조망 너머에 갇힌 자신의 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또래 노인들은 벌건 대낮부터 오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킨다. 이씨는 “아침이면 벌판이 군훈련장과 같다”고 말했다. 곤봉을 멘 병사들이 시위 진압훈련을 벌이고 아침 마다 울리는 병사들의 우렁찬 노랫소리와 나팔소리는 대추리의 일상 풍경이 되었다. 고교 졸업 후 고향 대추리를 떠나 청주에서 두 딸을 낳고 살다 노모 집에 잠시 들렀다는 주부 이은경(45)씨는 “38선에 온 느낌”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미 양국이 이곳 대추리로 서울 용산미군기지와 동두천 미2사단 병력을 이전하기로 합의한 것은 지난 2003년. 이후 3년간 미군기지 이전확장 반대투쟁을 해온 농민들에게서 진한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공권력 투입과 마을 고립에 이어 국방부는 주민들을 향해 ‘방 빼!’라며 최후 통첩을 던진 상태다. 국방부는 6월 말까지 대추리 집을 비우라는 퇴거장을 보냈다. 현재 국방부와 주민간 대화가 진행돼 당장 빈집 강제철거는 보류됐지만 강제 철거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강제철거 초읽기 들어가

마을 곳곳엔 한때 살가웠던 이웃 사촌 주민이 떠난 빈 집들이 폐가가 돼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대추리에 하나 뿐이었던 카톨릭 공소와 개신교 교회들도 건물을 국방부에 팔고 나간지 이미 오래. 교회가 대추리에 놔두고간 ‘양떼’들은 매일 오후 이곳을 찾아오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과 함께 ‘이 땅에 평화를’이라는 촛불을 어렵사리 밝혀가고 있다.

올들어 토지수용이 본격화되면서 국책사업을 내세운 정부와 일부 보수언론의 ‘총공세’는 대추리 주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데 효과를 본 듯 하다. 반대 주민 중 10억원 이상 보상을 받는 ‘백만장자’가 21명인데도 생존권 박탈이라는 것은 모순이라는 국방부의 발표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외부 불순단체의 개입이라는 일부 언론의 색깔공세, 폭풍 처럼 밀려드는 공권력 앞에 농민들은 “속수무책 당했고 남은 건 가슴의 ‘피멍’뿐”이라고 했다.

정태화(71) 노인회장은 “내 땅을 지키겠다는데 시내에 가면 온통 대추리 늙은이들이 돈 독이 들었다고 말할 때 마다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주민 이정오(70)씨는 “정부는 70%에 이르는 외지인 땅을 수용해놓고 땅 수용이 잘 됐다고 자랑하는데 정말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을 거부했다”며 “정부는 그런데도 일부 극렬 농민들이 외부단체 사주를 받아 반대하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고 언론 역시 진실보도를 포기했다”고 성토했다.

현재 기지이전 예정지내에서 토지수용을 거부한 가구수는 대략 90여가구. 대추리 162가구 중 66가구, 도두리 80가구 중 32가구가 남아 있다. 그나마 논·밭이라도 있는 일부 농민들과 달리 거의 빈손 처지의 ‘영세농’들의 시름은 유독 더 컸다.

시집와 43년을 대추리에 살아온 서삼파(66·여)씨는 논도 밭도 없이 집 한채에 2500만원이라는 감정평가를 받았다. 서씨는 “경비원하는 남편이 70살이 넘어 다음달이면 그만둔다”며 “5천만원도 안되는 보상금을 받고 어디가 늙은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 그냥 이곳에 있다가 집을 부수면 깔려 죽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대추리 지장물 조사를 나왔던 한국토지공사 직원들은 “서씨처럼 집 한채만 달랑 있고 논이나 밭이 없는 경우가 대추리에만 17가구에 이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추·도두리내 반대 주민 105가구 중 1억원 미만의 보상금을 받는 사람은 18가구, 2억원 미만이 22명, 3억원 미만 보상금을 받는 주민은 9가구 등 절반에 가까운 49가구가 3억원 미만이다.

논 1천평에 집 한채를 지닌 최진례(64·여)씨. “지난 대선 때 없이 사는 농민들을 위한다기에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내가 찍었어. 그런데 이제와 이게 뭐야.” 그는 자책했다.

섬 같은 생활이 2개월여를 넘어서면서 대추리 주민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영농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데 따른 경제적 고통이다. ‘미군기지 이전 확장 반대 평택대책위원회’ 이은우 정책실장은 “농민들 대부분이 마이너스 통장을 먼저 쓰고 수확한 작물을 팔아 갚는데 지금은 영농행위 자체가 중단된 상태”라며 “오죽했으면 일부 농민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거부했던 공탁금을 조금씩 빼 생활비로 쓰겠냐”고 말했다.

영세농의 시름은 더 커

노인이 다수인 대추리 주민에게 대규모 공권력이 동원된 5·4사건이 준 충격은 매우 커 보였다. 고립감 속에 나이든 농민들은 어린 대학생 등 17명이 구속되고 수백여명이 줄줄이 붙잡혀가는 사태에 분노하면서도 많이 위축됐다. 김지태 대추리 이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21일간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던 문정현 신부는 “주민들이 결국은 스스로 다시 털고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6일부터 한신대 학생들 50여명이 대추리 여름농활을 시작하면서 600여일을 넘긴 주민들의 촛불집회장은 물론 가라앉았던 대추리에 새 활기가 돋는 듯했다.

암투병 중인 몸으로 40여일째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작업중인 현장 미술가 최병수씨는 “물리력에서 워낙 힘이 딸리니까 언뜻 패배한 듯 보이지. 그러나 그게 공권력이 거둔 승리의 반대는 아니다”고 말했다. 농민은 물론 예술가, 시민 학생 노동자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름없는 이들이 대추리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대추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평화적 저항”이 ‘대추리 시위의 본질’이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정의의 하나님은 늦게 오실 뿐 반드시 오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미군폭격장 철수에도 6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고 인혁당 사건 재심판정을 얻는 데도 30여년이 걸렸잖아요” 천주교 인권위원회 변연식(51) 위원장의 설명이다. “인구 6천여명의 주민들은 물론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비에케스 기지 주변에서 살면서 인간방패로 나섰지요. 왜냐고요. 친척이 아프면 병문안 가듯 땅이 아프다고 하니까 함께 한 것이죠. 외부세력 개입? 정말 야비한 말이죠”라고 말했다.

‘대추리 시위는 이제 끝난 것 아니냐’는 외부의 시각에 대해 주민 송태경씨는 “이제 3라운드죠”라고 말한다. 최근 대추리 ‘리민의 날’ 행사 때 주민들은 돼지를 잡았다. 원래는 소를 잡기로 했으나 때마침 잡으려던 소가 송아지를 낳기도 했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주민 김영오(51)씨는 “마을 노인들이 6월 말이나 7월 초 나가겠다는 사람들은 다 내보내고 진짜 고향을 지키겠다는 사람들만 남아 소 잡아먹고 정말 싸워보자고 한다”고 전했다. “아마도 대추리와 도두리를 합쳐 20여가구 정도는 가지 않겠나 하는데 그러고도 남은 사람들은 이곳에다 정말 목숨을 파묻을 사람들 아니겠어요” 김씨의 말이다.

공탁금 빼 생활비 충당

홍용덕 기자
홍용덕 기자
‘평택 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는 국방부의 빈집 강제철거계획에 맞서 빈집 지킴이 모집에 나서고 있다. 5일부터 8일까지는 ‘평화야 걷자’는 도보행진에 나섰다. 팽성 수용지구 285만평을 따 285리를 걷는 이 행진은 청와대를 출발해서 대추리에서 끝나는데 이 행진이 평화를 향한 대추리의 또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평화바람’의 오두희씨는 “대추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추리가 16강에서 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월드컵 경기는 아니잖아요. 이것은 평화와 생존의 문제죠. 주민이 단 1명이라도 남겠다면 같이 있어야죠” 그의 설명이다.

평택/홍용덕 기자ydh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어도어와 계약 해지한 뉴진스, 왜 소송은 안 한다 했을까 1.

어도어와 계약 해지한 뉴진스, 왜 소송은 안 한다 했을까

마산 앞바다에 비친 ‘각자도생 한국’ [.txt] 2.

마산 앞바다에 비친 ‘각자도생 한국’ [.txt]

뉴진스 “29일 자정 어도어와 전속계약 해지…광고·스케줄은 그대로” 3.

뉴진스 “29일 자정 어도어와 전속계약 해지…광고·스케줄은 그대로”

세계인에 비친 한강…“마치 우리 작가가 쓴 것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txt] 4.

세계인에 비친 한강…“마치 우리 작가가 쓴 것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txt]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5.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