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많이 올라갈 때 (한국은) 고통을 덜 받았기 때문에 유가가 떨어질 때는 반대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한국은행이 내년 전기요금 인상을 감안해 물가 전망치를 재조정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올해 한국은 ‘에너지발 인플레이션’을 인위적으로 눌러둔 만큼, 내년에는 물가 고통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물가와 경기 사이에 선 한은의 정교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20일 물가안정 설명회를 열어 “(
지난달 경제전망을 내놓은) 뒤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내년 1월에 다시 전망치를 점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제전망을 조정한 지 불과 한달 만에 사실상 재조정을 예고한 것이다. 지난달 24일 한은은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6%, 경제성장률은 1.7%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일단 내년 ‘공공요금발 인플레이션’이 덮칠 가능성이 한층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전기요금 인상률은 기존 예상보다 더 높아질 것이 확실시된다. 이 총재는 “내년 중 전기요금 인상 폭은 11월 전망 당시의 예상보다 확대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한은은 내년 전기요금 인상률이 올해 수준일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물가 전망치(3.6%)를 산출한 바 있다.
전기요금 인상 폭의 확대는 내년 물가 전망치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떨어지고 있는 국제유가에 따른 물가 안정세도 국내에서는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올해 배럴당 130달러대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는 최근 70달러대로 내려온 상태지만, 유류세 인하 폭 축소가 그 효과를 일부 상쇄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고유가 국면에서 37%까지 확대했던 유류세 인하 폭을 내년 단계적으로 축소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져도 국내 기름값은 덜 하락하는 효과가 난다.
내년에는 올해 미뤄뒀던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고통이 본격화하는 셈이다. 이는 주요 국가들에 견줘 양호했던 국내 물가 상황이 내년에는 반대로 더 나쁠 수 있음을 뜻한다. 특히 전기·가스 요금 인상 등은 생산비용을 끌어올려 물가 전반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려가 높다. 경기 악화와 소비 둔화에 따른 물가 하락 효과도 상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총재는 유류세 인하 폭 축소와 공공요금 인상 등을 언급하며 “(올해까지는) 정부가 공공요금의 인상을 자제시킴으로써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줄여줬다”며 “앞으로는 공공요금이 현실화, 정상화될 필요가 생겼다”고 말했다.
결국 물가와 경기 사이에 선 한국은행의 정교한 대응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내년 경기가 나빠지는 한편 고물가가 지속되면 한은의 통화정책을 두고 ‘과잉 긴축’과 ‘과소 대응’ 논란이 동시에 일 것으로 보인다. 한은 내부에서는 경제 불확실성이 이례적으로 높아지면서 쉽사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30분가량 진행된 설명회에서 이 총재는 ‘불확실성’이란 단어만 8번 이상 언급했다.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정책 대응이 어렵다는 점을 에둘러 토로한 셈이다.
이 총재는 “내년 물가 오름세의 둔화 속도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며 “(데이터를 보면서) 정교하게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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