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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추경호 부총리는 왜 ‘물가 비중 0.27%인 라면값’과 싸울까

등록 2023-06-23 10:30수정 2023-06-23 13:34

밀 선물값 내렸지만 제분용 밀 수입가 여전
1분기 라면업체 매출원가율 거의 안 떨어져
폭리론 근거 없지만, 물가 불만 ‘표적’ 만들기
총리는 MB정부 때처럼 ‘공정위가 들여다봐’
19일 오후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라면판매대 모습. 연합뉴스
19일 오후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라면판매대 모습. 연합뉴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한국방송(KBS) <일요진단> 프로그램에 출연해 ‘라면업체들이 라면값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한 뒤, 라면업체들이 가격을 언제, 얼마나 내릴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라면값 인하는 다른 가공식품들에 대한 정부의 가격인하 압력으로, 그리고 실제 가격 인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추 부총리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년 9월, 10월에 라면값을 크게 올렸는데 (…) 1년 전 대비 약 50% 밀 가격이 내렸고 작년 말 대비로 약 20% 정도 내렸습니다. (…) 제조업체에서도 밀가루 가격으로 올랐던 부분에 관해서는 다시 적정하게 가격을 좀 내리든지 해서 대응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마는...”

시장경제에서 가격 결정은 기업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긴다. 가격을 올리면 판매가 감소하므로, 기업은 판매량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이윤이 극대화되는 지점에서 가격을 선택한다. 공급자들이 가격 담합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정부의 간섭은 오히려 소비자에게 해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추 부총리도 이런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정부가 원가조사를 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소비자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견제도 하고 가격 조사도 해서 압력을 좀 행사하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월요일 주식시장에선 상장사인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의 주가가 6.1%, 7.8%, 5.6% 떨어졌다. 주식을 팔았다는 한 개인투자자는 “감사원과 검찰의 움직임을 봐서는, 라면업체가 값을 안 내릴 경우 국세청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들이닥칠 수도 있겠다 생각해 리스크 회피 차원에서 팔아버렸다”고 말했다.

이 개인투자자의 우려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20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라면, 과자업체에 ‘원재료 가격 인하분을 소비자가격에 반영’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21일에는 한덕수 총리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원료 가격은 많이 내렸는데 제품 값이 계속 높은 것에 대해 경쟁을 촉진하도록 공정위가 담합 가능성을 좀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여당인 국민의힘이 나설 일만 남았다.

물가 급등에 부심하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0년 1월 여당인 한나라당은 공정거래위원회에 라면·빵·과자 등 식품업체들에 대한 가격담합 조사를 요구했다. 공정위는 다음날 곧바로 조사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날로 에스피씨(SPC)그룹이 빵값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이어 라면업체, 제과업체가 가격인하 대열에 합류하고, 부침·튀김가루 생산업체까지 값을 내렸다.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이 원조인 국산 라면은 한때 싼 값에 가난한 이들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존재였고, 지금도 우리 국민들이 즐겨먹는 간식, 대용식이다. 세계라면협회(WINA)가 지난 5월 업데이트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라면 소비량은 39억5천만개였다. 국민 1인당 연간 약 77개, 한달에 6.4개 꼴로 소비했다.

국내 라면시장은 농심, 오뚜기, 삼양식품, 팔도가 95%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 업체들은 2021년 8월과 2022년 8∼9월 밀가루 등 원자재가격 상승을 이유로 라면값을 큰 폭으로 올렸다. 가장 많이 팔리는 농심 신라면은 1봉지당 평균 676원에서 2021년 8월 736원으로, 지난해 9월 820원으로 올렸다. 2년간 21.3% 올린 꼴이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 집계로 보면, 라면물가지수는 2021년에 9.4% 뛰고, 2022년에 12.7% 뛰었다. 올 들어서는 5월까지 1.1% 올랐다.

그 뒤 밀값이 떨어지는 등 제조 원가가 내리고 있는데도 값을 내리지 않고 ‘라면업체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듯한 추 부총리와 한 총리의 말은 사실인가? 추 부총리의 말대로 급등했던 국제 밀값(선물가격)이 큰폭 하락한 건 사실이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 소맥 선물(5000부셀, 다음달 결제) 가격을 보면 2020년 7월 500달러 안팎에서 2022년 3월 1362달러까지 뛰었다가 지금은 720달러대로 떨어졌다. 그런데 라면업체들은 밀 선물을 사 쓰는 것이 아니라 제분업체에서 밀가루를 사 쓴다. 라면업체들은 국내 제분사의 밀가루 공급가격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기업인 간담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기업인 간담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라면 원료로는 밀가루 외에 팜유의 비중도 크다. 상장사들이 사업보고서에 공시하는 매출원가율은 제조원가 부담 추이를 파악하게 해준다. 농심의 매출원가율(개별재무제표 기준)은 밀값이 본격 상승하기 전인 2020년 73.4%였다. 2022년 75.5%까지 뛰었다가 올해 1분기에 72.6%로 2020년보다 약간 낮은 수준으로 내려왔다. 오뚜기는 2020년 79.2%에서 2022년 80.4%로 올랐는데, 올해 1분기 80.6%로 좀 더 올랐다. 삼양식품은 같은 시기 73.2%에서 73.7%, 74.2%로 매출원가율이 계속 상승했다. 라면 외에 다른 제품들까지 모두 포함해 집계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보면 라면업체가 제조원가보다 제품값을 올려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라면 업체들이 곧 굴복하지 않으면 정부가 제분사에 국내 밀가루 공급가 인하부터 압박하고 나설 것이라고 점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제분사들도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제분용 밀 수입가격은 관세청 집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2021년 5월 ㎏당 343원에서 2022년 9월 681원으로 갑절 오른 뒤, 올해 5월 562원으로 최고치에서 17.5% 내려왔다. 최고치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내렸지만, 작년 월평균 수입가격(577원)에 견주면 올해 5월까지 월평균 수입가격은 555원으로 별 차이가 없다. 공급가 인하 여지가 있더라도 라면업체들이 의미있게 값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클 지는 의문이다. 하필 국제 밀값이 6월 들어 큰폭으로 반등하고 있다.

라면값 인하는 소비자로서는 일단 반길 일이다. 하지만 라면 소비가 전체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아서, 가계살림이나 소비자물가에는 별 영향이 없다. 라면의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는 1000분의 2.7에 불과하다. 휘발유(20.8), 전기요금(15.5), 돼지고기(10.6)에 견주면 ‘굴러봐야 좁쌀’이다. 물가가 급등한 외식(126.7) 전체에는 더욱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추 부총리가 라면값을 겨냥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 부총리는 방송에서 ‘지표상으로는 조금씩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생활현장에 국민들께서 느끼시는 체감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 노력’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추 부총리는 라면을 가공식품의 상징으로 보는 것같다. 그는 라면업체들이 값을 올린 지난해 9월에도 식품업계에 민생부담을 가중시키고 물가 안정을 저해한다고 대놓고 비판한 바 있다.

물가 문제와 관련해 추 부총리가 이끄는 정부 경제팀의 처지는 사실 궁색하다. 원재료 국제가격이 떨어졌으니 국내가격을 내려야 한다면,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이 휘발유 등 석유제품, 그리고 전기요금이 대상일 것이다. 작년 5월 배럴당 110달러를 넘긴 원유선물(WTI)값이 70달러대로 떨어지고, 천연가스 가격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휘발유 등에 대해 깎아주던 유류세를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고, 가스요금과 전기요금은 앞으로도 올려야 할 일이 남아있다. 인상을 억제해온 교통요금 등 공공요금은 오르고 있다. 물가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지 않을 때, 정부는 ‘재료값이 떨어지는데도 가격을 낮추지 않는 기업’을 욕받이로 삼기로 마음먹은 것같다. 폭리를 취한다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요진단>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면 같은 그런 품목들은 상당히 시장 경제에 노출이 되어 있다고 보시는 게 오히려 맞을 거 같고요. 실제 문제는 경쟁에 노출되지 않은 독점적인 힘을 시장에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문제라고 보시는 게 오히려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라면값은 시장에 맡겨두고, 정부는 공기업이 맡고 있는 공공요금에 신경쓰라는 뜻을 정중하게 표현한 말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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