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내년도 예산안(513조5천억원)의 핵심은 세계 경기 둔화와 맞물린 한국 경제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한 투자를 가장 많이 늘렸다는 점이다. 미래 먹거리 산업과 수출·벤처기업 육성에 돈을 풀어 산업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의지도 담았다. 민간 경제를 살아나게 하기 위해 정부가 돈을 많이 푸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근본적인 구조개혁에는 강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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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에 집중 투자
정부가 지난해보다 예산을 가장 많이 늘린 분야는 수출·벤처·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부문이다. 여기에 23조9천억원을 투입해 지난해(18조8천억원)보다 27.5%(5조2천억원)나 늘렸다.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관심이 높아진 소재·부품·장비 등 각종 연구개발(R&D) 예산도 24조1천억원으로 지난해(20조5천억원)보다 17.3% 늘렸다. 도로·철도, 문화·체육시설 등 사회간접자본(SOC) 분야도 올해보다 12.9% 늘려 22조3천억원을 편성했다. 정부가 직접 만드는 일자리를 포함한 일자리 지원 예산도 25조8천억원으로 21.3% 늘렸다. 이들 분야 예산 증가율은 전체 증가율(9.3%)보다 높다.
‘인공지능 사회’를 목표로 데이터와 네트워크, 인공지능(AI)을 묶어 이른바 ‘디.엔.에이’(D.N.A) 분야 활성화에 1조7천억원을 투자한다. 데이터와 인공지능 융합 단지 조성, 스마트공장에 필요한 제조데이터 인프라 구축, 딥러닝 등 인공지능 기술 개발 등을 새로 추진한다.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을 공공서비스 분야에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동대문 가상현실(VR) 쇼핑몰 등 가상·증강현실 콘텐츠 개발을 지원한다. 정부가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선정한 빅3인 시스템반도체와 바이오헬스, 미래차(전기·수소차) 분야에도 3조원을 쓴다.
문재인 정부가 관심 갖고 역량을 쏟는 부분이 ‘제2 벤처 붐’ 조성이다. 여기에 지난해(3조7천억원)보다 1조8천억원 늘린 5조5천억원을 편성했다. 이 돈은 혁신창업펀드, 성장 단계 창업기업 지원, 해외진출 활성화 등에 쓰인다. 이를 통해 ‘배달의 민족’이나 ‘토스’ 앱 같은 유니콘 기업(자산 1조원 넘는 스타트업)을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소재·부품·장비 자립화에 2조1천억원을 투입한다. 수출시장 개척을 위한 출자·대출 등 무역금융도 올해 1조원에서 내년도 4조2천억원으로 대폭 늘린다. 제조업 등 주력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스마트공장 5500개도 보급한다.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고도화에 초점을 맞췄다. 도로·철도 운영에 인공지능 등 기술을 접목해 효율성을 높이고, 스마트시티 시범도시(부산, 세종) 사업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이외에 노후 기반시설 보수, 세종~안성, 포항~영덕 등 지역 거점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철도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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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계층 일자리 96만개 제공
위축되는 고용시장에서 밀려나는 취약계층을 위해 정부가 직접 만드는 일자리는 올해 78만5천개에서 내년엔 17만개 늘어난 95만5천개가 된다. 늘어나는 일자리 가운데 13만개는 노인 일자리다. 돌봄·안전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 예산도 1조3천억원을 투입해 이 분야에 총 9만6천개 일자리를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외에 기업이 청년을 새로 채용하고 노인 고용을 유지하도록 장려금을 지급하고, 직업훈련·구직급여 등도 늘린다.
정부는 경기가 가라앉는 상황이므로 당분간 적자가 나더라도 빚을 내 돈을 풀어 경기를 띄우겠다는 방침이다.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경제가 살아나면 자연스레 세금이 늘어나 나라 살림이 다시 건전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구윤철 기획재정부 2차관은 “성장을 키우는 쪽으로 돈을 더 넣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재정의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것”이라며 “연구개발에 원 없이 투자할 수 있도록 재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재정·거시정책 전문가들은 현재 정부 재정이 튼튼하고 금리도 낮은 상황이므로 정부가 적자 재정을 활용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령화 등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인 문제를 바꾸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저출산 대책이나 제조업 노동자 재교육 같은 경제사회 구조 변화 대처에 꼭 필요한 예산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지출을 늘리더라도 여러 분야에 골고루 쓰는 것보다 중요한 부분에 과감히 재원을 투입해야 효과가 크다. 그런 면에서 이번 예산 편성은 아쉽다”고 말했다.
이경미 노현웅 기자
kmlee@hani.co.kr